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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22일 11시 09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3월 22일 11시 09분 KST

세계 여성의 날, 여성 사진으로만 허프포스트를 채우기로 하자 생긴 일

더 많은 매체가 여성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세계 여성의 날'이었던 지난 3월 8일 '허프포스트코리아' 화면

간단한 아이디어였다. 여성의 날인 3월8일, 모든 기사를 여성에 관한 것으로 <허프포스트>를 채우자는 것이었다. 여성에 대한 기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관련 이미지라도 여성을 쓰자는 것이었다. 모든 신문과 뉴스 사이트는 언제나 남성들에 대한 기사와 남성들의 사진으로 넘친다. 그러니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방법으로 이처럼 괜찮은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 여겼다. “여성 관련 기사는 대개 다른 신문이나 뉴스 사이트에서도 메인에 올리지 않을 뿐 다양할 테니까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라고 뉴스룸 멤버(기자)들에게 말했다. 납득하는 기자도 있었고 납득하지 못하는 기자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밀어붙일 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박영선 기사도 나경원 기사도

하루가 시작됐다. 1면 메인 기사는 ‘미투는 정말 사회 변화를 일으켰을까? 여론은 긍정적으로 답한다’로 정했다. 사진은 서지현 검사의 얼굴로 했다. 기자들은 계속 여성 관련 기사를 찾아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가 됐다. 정부가 여성 고위직이 적은 공공기관에 페널티(벌칙)를 주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기사도 올라왔다. ‘우리는 100년 전 센 조선 녀자’ 언니들의 위트를 물려받았다는 블로그도 올라왔다. 꼭 좋은 기사만 올라오는 건 아니었다. “민주당이 선거법 쿠데타를 강행하고 나섰다”며 비난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기사도 있었다. 구조동물 안락사로 논란을 빚은 동물권단체 ‘케어’ 박소연 대표가 후원금으로 개인 보험금 수천만원을 냈다는 기사도 있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세계를 이만큼 전진시켜온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문 대통령은 여성이 아니다. 도대체 메인 사진으로 무엇을 써야 할까. 여기서 꼼수가 시작됐다.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찾아서 올리는 것이다. 라이프스타일 섹션에도 문제가 생겼다. 중국 팀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축구선수가 미세먼지 세리머니를 선보였다는 기사였다. 축구다. 남성이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방법을 찾아냈다. 이 기사를 보도하는 여성 아나운서 모습을 갈무리해 올리는 것이다. 한 기자가 말했다. “영화 <캡틴 마블>에 나오는 고양이 기사는요?” “고양이 성별이 뭐지? <캡틴 마블>에 나오니 암고양이일 거야. 괜찮아. 암고양이라고 생각하자.” 억지 춘향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하루가 끝난 순간 <허프포스트>는 여성에 관한 기사, 여성이 나오는 기사, 여성의 사진을 선택한 기사들로 모든 면을 채웠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건 정말이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걸 고백한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을 신문과 뉴스 사이트로 연다. 대부분 기사는 남성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 사진은 남성들의 사진이다. 이 세계의 중요한 일들을 대부분 남성이 결정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절반의 힘은 여성에게서 나온다. 그들에 대한 기사가 부족하다는 건, 여전히 이 세계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자연스레 채워지기를

나는 며칠 뒤 저녁 <캡틴 마블>을 봤다. 단순히 여성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캡틴 마블>은 다른 마블 영화들과는 완벽하게 다른 영화가 됐다. 여성이 남성 위주 사회에서 속으로만 품고 있던 힘을 각성하고 히어로로 다시 태어난다는 서사는 못내 감동적이었다. 더 많은 여성이 캡틴이 되어야 한다. 더 많은 매체가 여성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언젠가 <허프포스트>는 물론 모든 매체가 굳이 3월8일 여성의 날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여성 이야기로 절반을 채우는 매체가 되기를 바란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