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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20일 15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3월 20일 21시 17분 KST

블룸버그와 나경원, 그리고 민주당

역사에 남을 민주당의 '검은머리 외신기자' 논평

1.
지금 “spokesman” 기사 하나로 문통 지지자들은 물론 민주당까지 나서서 비난하는 블룸버그 이유경 기자는 반올림 일로 여러 번 만났던 기자다. 지금 사람들은 그를 나쁜 보수언론 기자들(저들말로 ‘기레기’)과 한통속인 양 취급하지만, ‘삼성 직업병’ 문제에서 그는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만 걸려와도 예민해지던 때가 있었다. 삼성의 언론 플레이가 한창일 때, 그래서 삼성 직업병에 관한 별별 말 같지 않은 소리가 사실인 양 기사화되고, 반올림은 온갖 독설받이가 되고 있을 때였다. 취재를 하기 보단 추궁하려 들고, 팩트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사전 조사라고는 삼성 홍보팀 얘기 주워들은 게 전부인 것 같은 다수의 한국 (특히 경제지) 기자들로부터 시달리던 때였다.

그의 전화를 처음 받은 것도 그때였다. 여느 기자들과는 태도가 달랐다. 무엇보다 삼성 직업병 사안을 정말 궁금해 하는 게 느껴졌다. 팩트에 대한 진지한 관심!!! 그것만으로도 엄청 반가울 때였다. 나중에 어떤 기사가 나오건 일단 취재에 적극 협조해야 겠다 생각했다.

이 사안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깊었다. 내 기억에 외신 기자들 중에는 가장 오래, 깊이 취재했다. 팩트체크도 엄청 꼼꼼했다. 가끔은 다른 일을 하기 힘들 정도로 전화가 많이 왔고 요구하는 자료도 많았다. 하지만 대응하는게 결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났다. 팩트체크하겠다고 달려드는 기자한테 보여주고픈 자료는 많았으니까. 보여 달라는 기자가 없었을 뿐. 모처럼 휴가를 가서도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와 한참 동안 통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물론 그는 내가 휴가 중인걸 몰랐다).

기사 내용도 좋았다. 특히 2016년 8월에 나온 「2 words keep sick Samsung workers from data: trade secrets」란 기사는 그간 삼성과 정부가 벌여왔던 자료 은폐 문제를 잘 정리해 주었다. 그 기사에 대해 삼성은 반박 보도자료까지 냈고, 한국 언론들은 역시나 사실확인 없이 그 보도자료만 열심히 퍼날랐다. 그럼에도 그는 거침없이 후속기사를 썼다. 법원에서 중요한 직업병 인정 판결이 나오면 그 내용을 해외에 잘 전달하는 기사도 썼다. 정작 한국 언론들은 잘 쓰지 않는 기사였다.

당시에는 AP 소속이었는데 작년 가을 블룸버그로 옮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서도 정치외교 파트란다. 취재 분야가 멀어진 건 무척 아쉬웠지만 어디서건 제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다.

일단 그래서다. 나는 지금 이유경 기자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에 하나도 동의할 수 없다.

2.
문제의 기사(「South Korea’s Moon Becomes Kim Jong Un’s Top Spokesman at UN」, Bloomberg 2018년 9월 25일)도 찾아 봤다. 여러번 읽어봐도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 잘 모르겠더라. 나보다 영어와 외신기사에 훨씬 익숙할 지인들에게도 보내봤지만, 반응은 비슷했다. “이게 왜?” 오히려 “엄청 자제해서 쓴거 같은데?”라는 반응도 있었다.

기사는 요즘 국제 사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도했다. 열심히 김 위원장을 칭찬하고 다닌다고, 그의 입장을 적극 대변하고 있다고 썼다. 국제 사회는 여전히 김정은을 의심하지만 문재인은 “이번에는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한다는 거다. “spokesman”은 문통의 그러한 태도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이 기사가 민주당, 혹은 문통 지지자들로부터 비난받는 이유는 뭘까. 일단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가 그러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거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문통은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거다. 어디서건 기회될 때마다 ‘우리 김 위원장 좀 잘 봐주세요’ 할테고, 그래서 어떻게든 김 위원장을 대화가 가능한 지도자로 비춰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거다. 정상회담 때 그렇게 둘이 꽁냥꽁냥했고, 그 모습에 국민들이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이제 와서 서로 경계하거나 모른 척하면 안된다고 생각할거다. 나의 생각도 분명 그렇거니와, 모처럼 조성된 남북화해무드를 반기는 국민들 대다수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렇다면 이 기사를 대체 왜 비난하는 걸까?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의 그러한 태도를 ‘top spokesman’이라 표현했기 때문일거다. 물론 그것이 나경원에 의해 확대ㆍ재생되어 더 화가 났을 테고. 그런데 기사는 ‘top spokesman’이란 표현을 어떤 맥락으로 썼나. 나경원이 인용한 맥락대로 ‘문통이 밖에서 김 위원장 대변인 노릇이나 하고 다닌다’는 뜻인가? 기사 전체 내용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기사는 단지 요즘 문통의 친 김정은 행보가 매우 두드러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심지어 기사에는 문통의 그러한 전략은 두 사람(김정은, 트럼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데 맞추어져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top spokesman’이란 표현에 비꼬는, 혹은 지나치다는 뉘앙스가 있을 수 있다. 더욱이 제목을 그렇게 썼으니 다소 편향된 기사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외국에서 볼 때 김정은 위원장은 여전히 독재자고 북한은 여전히 반인권 국가다. 북한과 미국이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것처럼 싸우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갑자기 남한의 대통령은 어디든 가서 ‘우리 김 위원장 잘 좀 봐주세요’ 한다. 매우 적극적으로. 외신이 그런 상황을 전하며 이 정도 표현을 쓴 것이 그렇게 지나친 것인가?

어쩌면 그럴 수 있다. 기자의 의도야 어쨌건, 나경원 대표나 조선일보 같은 이들에 의해 악용될 꺼리를 주었으니 욕먹는 거라고. 만약 그렇다면 스스로 지나치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기레기”고 그래서 “매국”이냐 말이다.

3.
물론 문재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칭찬하고 대변하는 모습이 너무 싫은 이들이 있다. 자한당 일부 의원들이 그렇고 아마도 조선일보가 그렇다. 그들은 남북화해모드가 싫다. 나경원 대표가 기사에서 ‘top spokesman’이란 단어만 떼어 와 “낯부끄럽다!”고 언성을 높인 것에는 나름 일관성이 있다.

물론 나 대표의 입에서 나온 ‘수석 대변인’이란 표현에는 다른 맥락도 보인다. 친북을 넘는 종북 딱지 붙이기. 그 지겨운 색깔 놀음을 다시 해보자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여당으로서는 나대표의 발언을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청와대까지 나서서 사과를 요구하고 여당 대표가 ‘국가원수 모독죄’까지 언급하며 판을 키워줄 사안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 발언의 저열한 수준을 엄하게 꾸짖으며 “진흙탕 싸움 할생각 없고, 그냥 우리 할 일 하겠다”고 넘겼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민주당 대변인이 블룸버그 기사를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 브리핑한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저열했다.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란 표현에서는 인종차별적 느낌마저 든다. 나는 솔직히 나대표의 발언 보다 이게 더 놀라웠다. (이 글은 무엇보다 민주당의 저 논평 때문에 쓴다.)

덕분에 나대표만 신이 났다. 아마 본인도 이 정도 효과는 기대하지 못했을 거다.

4.
어쩌면

민주당은 자신이 없었는지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이 바깥에서 김정은의 입장을 적극 대변함으로써 그를 국제 사회 일원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그 필요성을 설명하며, 자한당이 펼 색깔론에 당당하게 대응할 자신이 없어,

갑자기 ‘수석 대변인’이라는 말이 터져나오니 그저 움찔하여,

“그 발언은 망언이다”, “그 뉴스는 가짜다”라는 말만 늘어 놓는 것일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 한심한 노릇이다.

5.
지금 이유경 기자를 향한 비난의 중심에는 그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 있다. 개인 블로그나 SNS에서는 물론이고, 일부 언론조차 ‘검은 머리 외신 기자’라는 괴랄한 표현을 버젓이 쓴다. 심지어 민주당의 논평에도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검은 머리 외신기자” 따위의 말이 나온다(정말 역사에 남을 논평이다). 난 지금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가장 저열한 점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대체 기자의 국적은 왜 따지는가.

한번 차분히 가정해 보자. 만일 이유경 기자가 외국 이름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기사에 대한 반응이 지금과는 달랐을 거다. 기사 내용을 더 자세히 보고 개개의 표현보다 전체 맥락을 더 살폈을지 모른다. 설령 ‘spokesman’같은 표현이 여전히 불편하더라도 그게 뭐 대수냐, 외신은 그 정도 쓸수 있지,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아가 블룸버그 기사의 내용과 나대표의 발언 내용을 확연히 분리하였을 것이고, 설령 나대표가 “그 기사를 인용했을 뿐”이라 쉴드쳐도 “기사 내용을 지들 수준에 맞게 곡해하고 악용했다”고 받아쳤을 것이다.

지금처럼 기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치 대단한 진실이라도 발견한 양 퍼나르며, 심지어 기자 사진까지 돌리며, ‘외신인 줄 알았는데 한국 기레기였다’는 식으로 조리돌림하지는 않았을 테고.

민주당도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 ”검은 머리 외신 기자” 따위의 브리핑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다시 묻자. 대체 기자의 국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