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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적 위기' : 영국 하원의장이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투표를 좌절시켰다

  • 허완
  • 입력 2019.03.19 16:03
  • 수정 2019.03.19 16:09
ⓒReuters TV / Reuters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둘러싼 혼란이 또 한 번의 예상치 못한 극적인 사태를 만들어냈다. 브렉시트를 불과 11일 앞두고 벌어진 ”헌법적 위기”다.

테레사 메이 총리는 애초 이번주에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3차 승인투표(meaningful vote)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지난 1월(230표차)과 2월(149표차)의 압도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메이 총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련의 투표들 끝에 드러난 메이 총리의 전략(만약 이게 전략이라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합의안이 통과되면 브렉시트는 딱 3개월만 연기될 테고, 합의안이 부결되면 브렉시트는 훨씬 더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감안들 하시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알아서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반복되는 여러 차례위기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자리를 지켜온 ‘생존왕’ 메이 총리의 이 벼랑끝 전술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메이 총리가 가져온 합의안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지만 브렉시트가 하염없이 연기되는 건 더더욱 눈 뜨고 보기 싫었던 반대파 의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메이 총리의 압박이 통해 마침내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극적으로 브렉시트 합의안이 통과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트럼프도 울고 갈 협상의 기술!

그러나 영국에는 의회가, 의회에는 고집스러운 의장 존 버커우가 있었다.

″질서를 지키세요! (Order! Order!)” : 존 버커우 하원의장의 트레이드마크

버커우 하원의장은 18일(현지시각) 메이 총리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3차 승인투표 자체를 사실상 무산시킨 것이다. 하원의장은 어떤 안건을 상정하고 상정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버커우 의장은 메이 총리가 3차 승인투표를 안건에 올리는 건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미 지난주에 하원에서 부결된 것과 ”똑같거나 상당히 똑같은” 브렉시트 합의안을 두고 또 표결을 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법률 용어로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이다.

근거는? 버커우 의장은 1604년에 제정된 규정에 근거해 1844년도에 마련된 의회 의사진행 절차에 관한 규정을 설명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헌법학자 토마스 어스킨 메이(1871-1886)의 이름을 딴 이 규정은 지금까지 총 24번에 걸쳐 수정됐다. (개정을 거치면서 1000쪽 분량으로 불어난 이 규정집은 현재 하드커버로 439.99파운드, 약 66만원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버커우 의장은 이같은 ”강력하고 오랫동안 이어진” 원칙에 따라 1864년, 1870년, 1882년, 1891년, 1912년에도 의장이 마찬가지의 결정을 내린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역사 참교육... 

이에 따라 정부는 동일한 회기 중에 부결됐던 안건을 재상정할 수 없으며, 안건의 ”문구”만 바꿔서 될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변화가 있어야 재상정될 수 있다고 버커우 의장은 설명했다.

이는 EU와의 추가 재협상을 통해 새로운 합의안을 가져와야 의회에 상정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브렉시트 예정일(3월29일)이 11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영국 하원의장은 이같은 (재상정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일찍 밝혔더라면 테레사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2차 투표 결과가 달랐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 (존 버커우 하원의장) ″친애하는 의원님께서 제가 하지 않았지만 그 때 당시에 제가 할 수도 있었던 말을 해줬다면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결정에) 도움을 받지 못했던 의원들에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전체적으로 보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의원님의 논리가 흠 잡을 데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메이 총리의 측근인 법무차관 로버트 버클랜드는 분개한 표정으로 의장의 결정이 ”중대한 헌법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정부가 여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의회를 해산해(회기 종료) 새 의회를 소집한 다음 브렉시트 합의안을 상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영국 여왕에게는 언제든 의회를 해산시킬 특권(Royal prerogative)이 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그렇게 하는 것 역시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보수당 알렉스 버그하트 의원은 하원이 이 규정을 수정할 수 있는 거냐고 물었고, 의장은 그건 하원이 결정할 문제라고 답했다. 물론 여야가 수정안 통과에 합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스카이뉴스의 루이스 구달 기자가 찾아낸 해당 조항_1884.jpg)

 

메이 총리의 구상이 좌절되면서 브렉시트의 운명은 다시 불투명해졌다.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영국은 3월29일에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게 된다. 

EU는 이날 영국 하원에서의 사태가 벌어진 직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가디언에 따르면, EU는 기존 합의안에 담긴 브렉시트 날짜를 수정(연장)하는 데 동의해 줄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우선 모두가 우려하는 노딜(no deal) 브렉시트의 재앙적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된다. 또 버커우 하원의장에게도 안건 상정을 승인할 새로운 명분이 될 수 있다. 메이 총리가 구상했던 3차 승인투표가 결국 성사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물론 3차 승인투표가 성사되더라도 이게 통과될 것인지 여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편 정부는 물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버커우 의장의 개입은 그동안 브렉시트 찬성파와 반대파 모두에게 환호와 미움을 동시에 받아왔던 그의 존재감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가디언의 선임 소셜 담당기자 마틴 벨람은 버커우 의장을 축구선수에 비교해보았다.

버커우는 옐로카드를 수없이 받으면서 경기 흐름을 해치는 안티-풋볼 중앙 미드필더여서 사람들의 혐오를 한 몸에 받다가 느닷없이 우리 팀에 영입되어서는 그의 패스 각도와 그가 창의적 선수들을 위해 공간을 열어주는 것에 환호하게 되는 그런 이들 중 하나다. 

  

허완 에디터 : wan.heo@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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