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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 동영상, 궁금한가요

선정적 보도 경쟁도 관음증적 관심을 부추겼다.

ⓒ뉴스1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겐 일과 관련된 거니까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고는 읽고 말았다. 성관계 영상 불법 촬영·유포 혐의를 받고 있는 가수 정준영의 피해자 명단이 이른바 ‘지라시’로 돌고 있었다. 진짜일까? 누가 어떻게 왜 이걸 만들어 돌리는 걸까? 여러 의문을 떠올리다 찜찜해졌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파악하고 취재하면 될 일이다. 명단을 보는 순간 나 또한 2차 가해에 동조한 것임을 헤아리지 못했다.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으로부터 촉발된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 온갖 병폐의 축소판이라 부를 만하다. 승리, 정준영 등의 개인 일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찰과의 유착 같은 구조적 비리에도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씁쓸하고 심각하다 할 만한 일들마저 벌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가 터진 직후 포털사이트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버닝썬 동영상’ ‘정준영 동영상’ ‘정준영 걸그룹’ 같은 말들이 올라왔다. 많은 이들이 승리와 정준영을 욕하면서도 뒤에선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며 찾았다는 얘기다.

SNS 지인의 글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부터 주변을 잘 둘러보세요. 정준영이 몰래 촬영한 여자들 목록 찾는 사람, 정준영이 친하게 지낸 여자 연예인 검색하는 사람, 지라시로 돌고 있는 연예인 목록 공유하는 사람, 세상이 다 그렇지 하며 초연한 듯 말하는 사람, 승리나 정준영이 남자로서 부럽다 말하는 사람, 관련된 연예인들 실드 치는 사람, 뉴스에 나온 ‘물뽕’ 사려고 검색하는 사람, 피해 여성들 욕하거나 꽃뱀 취급하는 사람, 버닝썬 몰카 찾는 사람. 상종하지 마세요.” 이 글에 1200명 넘는 사람이 공감을 표시했고, 270번 넘게 공유됐다.

언론들의 선정적 보도 경쟁도 관음증적 관심을 더욱 부추겼다. <채널A>가 지난 12일 정준영 동영상에 등장하는 피해 여성이 7~8명에 이르며 연예인 한명도 포함됐다고 전한 보도는 그 정점이었다. 그 연예인을 미뤄 짐작하게 할 만한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저급하게 화제성 노려서 피해자 2차 가해 하는 보도다. 기레기란 말이 딱이다” 같은 댓글이 줄을 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서 누군데?’ 했을 텐데 반응 보고 어리둥절할 듯. 시민의식은 성숙해져가는데 시대를 못 따라가면 도태돼야지”라는 일침도 있었다. 결국 <채널A>는 해당 보도를 인터넷에서 삭제하고 사과했다.

<채널A>의 보도 다음날인 13일 SNS에서 노란 바탕에 빨간 글씨를 새긴 ‘경고장’이 퍼져 나갔다. ‘우리는 피해자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를 추측하는 모든 사진·동영상 유포=2차 가해. 지금 당신이 멈춰야 합니다’라고 적은 세가지 디자인의 경고장이 SNS 타임라인을 노랗게 물들였다.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이번 사태로 밑바닥까지 드러낸 한국 사회는 이렇듯 자각하고, 자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걸 모르고 못 따라가는 자는 네티즌의 일침대로 도태될 따름이다.

어느 남성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외신과 한 인터뷰를 SNS로 접했다. 그는 남자들끼리 야동을 돌려 보고 하는 심리는 이해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댓글로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문제는 야동이 아니다. 상대방 동의 없이 영상을 촬영하고 돌려 보는 건 범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불법 영상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봤더니 내 가족이 나오더라’는 상상을 해보자. 피가 거꾸로 솟지 않겠는가. 당신이 그렇다면 남들도 그렇다. 설혹 과거에 죄의식 없이 불법 영상을 돌려 본 경험이 있더라도 이제는 하지 말자. 내 딸을 위해서라도 2차 가해와 불법 영상을 없애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해본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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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촬영 #정준영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