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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마블' 이것은 페미니즘 영화다

‘캡틴마블’ 이전엔 아무도 외모를 지적하지 않았다.

  • 민용준
  • 입력 2019.03.19 11:11
  • 수정 2019.03.19 15:26

<캡틴 마블>은 영웅의 탄생을 그리고 있지만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과 전혀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될 거다. 빨리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마블 스튜디오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케빈 파이기 대표는 일찌감치 <캡틴 마블>에 대해 강력한 자신감을 표했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20억 불 이상의 수익을 올린 동시에 국내에서도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속편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4월 개봉을 예고한 가운데 이 작품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칠 캐릭터로 일찌감치 점지된 캡틴 마블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영화란 점에서 <캡틴 마블>은 이미 큰 기대를 모으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난 3월 6일 개봉 이후로 불과 5일 만에 국내에서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캡틴 마블>은 북미를 포함한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대부분 석권했고, 전 세계 오프닝 성적만으로도 5천억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캡틴 마블>은 개봉 전부터 수많은 논란에 시달렸다. 논란의 중심에 서있었던 건 바로 캡틴 마블 역으로 캐스팅된 브리 라슨이었다. MCU 영화 안에서 캐스팅에 관한 논란이 일어난 건 처음이기도 했다. 브리 라슨이 캐스팅된 것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내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코믹스 원작에서의 캐릭터에 비해 브리 라슨의 외모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캡틴 마블> 공식 예고편에서의 브리 라슨이 좀처럼 웃지 않는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급기야 예고편 상의 브리 라슨 얼굴을 웃는 얼굴로 편집해 합성한 이미지가 SNS상에서 떠돌기도 했다. 기존의 MCU 영화팬을 자처하는 일부 남성팬들은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을 두고 ‘페미니즘 영화’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로튼토마토와 같은 영화 평점 사이트에서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부터 <캡틴 마블>에 낮은 평점을 주는 테러를 감행했고, 이에 해당 사이트에서는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평점을 기재하는 것을 막는 초유의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캡틴 마블>이 개봉하기 전부터 포털사이트에서 낮은 평점을 달며 극장에서 ‘페미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댓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브리 라슨이 지금까지 MCU 영화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주연배우 가운데 처음으로 외모를 지적당한 주연배우라는 사실이다.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토르>의 크리스 헴스워스, <캡틴 아메리카>의 크리스 에반스, <앤트맨>의 폴 러드, <블랙 팬서>의 채드윅 보스만, <스파이더맨>의 톰 홀랜드 등 지금껏 MCU의 세계관에서 주연을 차지했던 배우 중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배우는 없었다. 흥미롭게도 <캡틴 마블> 이전까지의 주연배우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을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남초 현상이 강한 웹사이트에서는 브리 라슨에 대한 반발심을 남기는 남성 유저들의 흔적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캡틴 마블>이 작품성을 인정받고, 준수한 흥행성적을 기록한 뒤에는 <캡틴 마블>이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라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에 동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캡틴 마블>은 과연 페미니즘 영화가 아닌 걸까?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 주인공을 앞세운 마블 영화가 나오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를 묻자, 이와 같이 답했다. “<어벤져스>의 초창기에는 남자들이 많았다.” 이는 마치 MCU에서도 유리 천장이 존재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캡틴 마블이라는 캐릭터가 대두되기 위해서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는 의미가 읽힌다. 물론 캡틴 마블이 MCU에서 처음 등장한 여성 슈퍼히어로인 건 아니다. <어벤져스>의 블랙 위도우와 스칼렛 위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가모라와 네뷸라 등 존재감을 피력한 여성 캐릭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캡틴 마블> 이전까지 타이틀롤을 맡은 여성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벤져스>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일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나마 처음으로 여성 캐릭터의 타이틀롤이 포함된 <앤트맨과 와스프>가 좀 더 진전된 결과였다고 할까. 그리고 비로소 올해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블랙 위도우의 솔로 영화에 대한 논의가 오래전부터 진행됐던 것을 생각해보면 마블 스튜디오가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건 히어로물 제작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거듭해왔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캡틴 마블>이 거두고 있는 성공은 장차 MCU에서 새로운 여성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운 솔로 영화 제작에 탄력을 받을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나는 ‘여성 주인공의 히어로물이 잘될 수 있을까?’ ‘여자로서 그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처럼 묻게 되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받던 시대부터 영화에 존재해왔다. 우리는 이미 모든 예술 운동의 주요한 일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모습대로 움직이려 하면 사람들은 실제로 거기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며 우리를 밀어낸다.” 브리 라슨의 말은 <캡틴 마블> 개봉 전부터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배우의 외모에 불평하던 이들은 배우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것에 분노를 표출했다. 이렇듯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심과 혐오감을 표하는 남성들의 반응은 역설적이지만 작금의 시대에서 페미니즘이 화두가 될 만한 자격을 몸소 설명해주는 강력한 근거처럼 보인다. 

<캡틴 마블>은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슈퍼히어로 캡틴 마블의 기원을 살피는 영화다. 그리고 관객들은 캡틴 마블이라는 슈퍼히어로가 1990년대 초반의 현실 세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투 비행에서 배제돼야 했던 미공군의 시험 비행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유년시절부터 조신하고 나약한 여성성을 요구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그때마다 스스로 일어나는 여자였다는 것을 끝내 목격하게 된다. 남성들로 점철된 레이싱 트랙에서, 야구장 타석에서, 비행사 선발 훈련장에서 넘어지고 조롱당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는 캐럴 댄버스의 모습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떤 여성 관객들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을 거라 생각한다. <캡틴 마블>은 너무나 명확하게도 남성성으로 무장한 시대의 한계를 박차고 나아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날아오르는 여성을 대변하는 슈퍼히어로의 영화다. 그런 면에서 <캡틴 마블>은 가장 대중적인 페미니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이런 태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여성 히어로가 페미니즘과 무관한 존재라고 애써 분리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그가 강력한 페미니즘의 화신임을 확신하게 만드는 반응처럼 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여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거나, ‘너에게는 너무 위험해. 넌 다칠 수 있어’라는 말을 듣는다. <캡틴 마블>은 그런 상황 속에 놓인 캐릭터가 자신을 억누르지 않고 앞에 놓인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배우는 과정에 관한 영화다.” 케빈 파이기의 말처럼 <캡틴 마블>은 배려와 매너라는 미명 하에 차별과 억압의 공고한 성벽을 쌓아온 남성들의 세계에 갇히길 거부하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른 여성에 관한 선언적인 영화다. 실제로 브리 라슨은 케빈 파이기와 처음 만났을 당시 기존의 코믹스 원작에서 미즈 마블을 포함한 캡틴 마블의 원작 캐릭터들이 대부분 지나치게 과한 노출이 요구되는 코스튬을 입고 성적으로 대상화돼 있음을 지적했고, 케빈 파이기 역시 이에 동의했다. 처음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캡틴 마블을 위해 선택된 원작 버전은 <캡틴 마블>의 원작 코믹스를 그린 작가 중 첫 여성 작가였던 켈리 수 디코닉의 것이었다. 2012년에 새롭게 <캡틴 마블>을 리부트 한 켈리 수 디코닉의 캡틴 마블은 기존의 코스튬과 달리 노출이 부각되지 않는 슈트 형태의 복장으로 디자인됐고, 이는 스크린에 등장할 캡틴 마블의 원형이 됐다.

<캡틴 마블>을 위해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 과정을 거치던 브리 라슨은 자신의 체력적 고충을 걱정하는 남자들의 언어가 오히려 여성의 한계를 규정짓는 선입견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테면 무거운 것을 들고 가는 여성에게 “이건 내가 들어줄 수 있는데”란 식으로 말하는 남성들의 태도는 애초에 여자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선입견을 전제에 둔 매너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육체적인 단련을 통해 캡틴 마블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여성성에 대한 선입견을 돌아보고 뒤집어볼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저 한 자리를 채워주는 일원이 아니라 주체적인 리더가 될 수 있는 존재로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비로소 <캡틴 마블>에 출연하는 것을 주저했던 처음과 달리 자신이 거둬야 할 결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는 모든 여자 캐릭터들을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여자들의 <어벤져스>에 푹 빠졌다. 그들 모두가 함께 한 자리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걸 볼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거 같다.” 브리 라슨의 바람은 첫 번째 발을 뗐다. 동시에 <캡틴 마블>은 마블 스튜디오에서 전개한 MCU 영화 가운데 최초로 여성 감독이 참여한 작품이기도 하다. 최초의 여성 감독이 참여한, 최초의 여성 롤 타이틀 솔로 영화인 <캡틴 마블>은 결국 첫 비행에 성공했다. 

혹시라도 <캡틴 마블>의 성공과 이를 둘러싼 페미니즘적 지지가 세상을 두 동강 내는 재앙처럼 보이는 이가 있다면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다. <캡틴 마블>의 캐럴 댄버스는 자아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끊임없이 남성 중심의 세계관 안에서 평가되고 재단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끝내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인정하는 모습으로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 누군가에게 증명하거나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강력하게 선언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버텨온 여성들에게 그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님을 명확하게 전한다. 이는 최근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화제를 모았던 유명 스포츠웨어 브랜드의 여성 캠페인 광고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인정하는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한 모습이 내가 바라는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여성의 삶이 될 수 있다는 것 혹은 그럼 삶이어야 한다는 것. <캡틴 마블>은 바로 그런 시대적 요구를 수용한 새로운 선언이다. 이렇게 쌈박한 페미니즘 영화를 볼 기회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더 많은 캡틴 마블이, 여성 히어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블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블랙 팬서>라는 완벽한 흑인 영화를 만들어낸 그들은 <캡틴 마블>이 탁월한 여성영화가 돼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탁월한 방식이 된다는 것을. 물론 여전히 <캡틴 마블>의 성취를 인정할 수 없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어차피 <캡틴 마블>은 할 말을 다 했으니까. ”난 너에게 증명할 것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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