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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자 기혼남인 이웃과 바람을 피웠다. 그의 아내가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우리는 연인이 되기 전 몇 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Gary John Norman via Getty Images

몇 달 전 뜬금없이 이메일이 도착했다. 내가 몰래 사귀었던 남성의 아내가 보낸 메일이었다. “내 남편과의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었나? 언제부터 언제까지 만났는지 알려달라.”

나는 그녀가 무엇을 아는지, 알긴 아는지 늘 궁금했다. 왜 이제 와서 나에게 이러는 걸까? 나는 그녀의 남편(여기서는 마이크라고 부르겠다)과 연락한지 5년도 넘었다. 지금은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다.

“당신이 저지른 일을 생각했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다.”라고 그녀는 썼다. 내가 그녀의 남편을 게이로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그들의 결혼을 내가 깼다고?

불을 뿜는 듯한 그 메일은 서둘러 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속임수는 생명이 길고, 되돌아와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나는 그녀의 남편과 내가 몰래 만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 위험했다. 내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메인 곳이 없는 사람이었고, 내 성적 지향은 비밀이 아니었다. 반면 마이크는 아이가 둘 있고 가정에 헌신하는 남성이었다. 아내를 사랑했다.

그는 내 옆집 이웃이었다. 내가 그보다 20살 많긴 했지만 나는 그를 유혹하지 않았다. 그가 관계를 가진 남성은 내가 처음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나는 여러 남성들을 만나왔다. 우리의 만남은 갑자기 열정으로 가득차 고운 날개로 달까지 날아가는 관계가 아니었다. 장거리 기차 여행과 비슷했다. 천천히 시작했고 5년 정도 지속되었다.

나는 마이크 말고도 유부남들을 만나 보았다. 하지만 다른 남성들과는 원나잇스탠드를 했거나 그저 섹스만 하는 사이였다. 기꺼이 나와의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사람들이었다.

마이크는 달랐다.

우리는 여러 모로 정반대였다. 나는 잡지 에디터였다. 마이크는 솜씨 좋은 목수였다. 나는 예술을, 마이크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나는 좋은 옷에 돈을 쏟아붓고 매달 두 번 머리를 잘랐다. 마이크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입었다. 주로 컷오프, 티셔츠, 버켄스탁, 연장 벨트 차림이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없던 날 밤, 우리는 거대한 행성이 지구를 향해 오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그는 16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다고 말했다. 부모가 영화, TV, 대중 음악을 악마의 도구로 간주하는 복음주의자였기 때문에 몰래 보았다고 했다.

우리의 공통점은 과거에 대한 열정이었다. 어느 날 밤 마이크는 철거 예정인 소방서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몰래 침입했다. 그는 사라질 것들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주철로 된 농부의 싱크대, 2층 창문으로 얼음을 끌어올릴 때 쓰는 도르래. 그는 소방서 건물의 기발한 기둥과 빔 건축 양식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식탁에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가족의 그림이 새겨진, 안이 나무로 된 보석 상자를 보여준 적이 있다. 내 증조할머니가 독일에서 구입한 물건이었다. “아름다워.” 그는 여러 종류의 나무로 구성된 상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게 말했다. “절대 팔지 마.”

내 낡은 아파트는 언제나 수리할 곳이 많았다. 나는 천장 팬 설치, 초인종 수리에 대해 전혀 몰랐다. 마이크는 잘 알았다. 마이크는 일주일 동안 참을성있게 내 부엌의 비드보드 표면을 손질해 준 적이 있다. 사포와 베이비 오일만 써서 100년은 된 나무를 새것처럼 반짝거리게 만들어 냈다.

우리는 연인이 되기 전 몇 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검은 곱슬머리, 코발트색 눈, 축 처진 속눈썹을 지닌 마이크는 자기가 얼마나 섹시한지, 얼마나 섹시해질 수 있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허영이 없다는 것이 그의 매력을 더욱 키웠다. 그의 아내가 자기 직장에서 열리는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하는 행사에 마이크도 같이 가야한다고 우겼을 때, 나는 그에게 내 턱시도를 빌려주었다. 손에 마티니만 들려준다면 제임스 본드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마이크는 아내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고 나서 내 집에 들르곤 했다. 같이 야구를 보고 팝콘을 만들었다. 가끔은 마리화나를 함께 피웠다. 그러면 ‘앤티크 로드쇼’[미국 TV 프로그램]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마이크가 작업실을 빌릴 돈이 없다고 해서 톱과 연장을 내 다락방에 두게 해주었다. 그러자 언제나 그를 보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다. 노골적인 것도 있었다. 게이 남성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교 때 다른 남학생에게 끌렸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보통 맥주 몇 병을 마신 뒤에 본심을 털어놓았다.

어느 날 오후 내 다락방에서 서로 포옹한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의 관계가 육체적이 되고 나서도 몇 달이 지나서야 마이크는 편한 마음으로 키스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개방된 관계를 유지하는 게이와 이성애자 커플들을 안다. 그들 상당수는 키스를 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과 뭐든 해도 좋다고 약속한다. 섹스는 순수히 촉각적인, 쾌감을 주는 경험일 수 있다. 하지만 키스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나와 마이크 둘 다 밤시간은 자유로웠다. 나는 50대였고 디스코와 바는 졸업한 뒤였다. 당시에는 그라인더도 없었고 크레익스리스트는 초기 단계였다. 나는 신문 광고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웃이지만 마이크의 아내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녀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책, 고양이, 정원이 그녀의 기쁨이었다.

“아내가 우리 일을 알면 어쩌지?” 내가 마이크에게 물었다.

나는 연애 중 상대가 바람을 피운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어떤 기분인지 안다.

“난 걱정 안 해. 대립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거든. 언젠가는 밤에 자기는 피곤하다며 가서 엉덩이 친구랑 놀라고 하더라.” 마이크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알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그의 아내가 좋은 이웃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내 양심이 편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우리 주에서 2004년에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남편을 훔칠 생각은 없었다.

마이크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완전히 솔직한 말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살며 가까운 친구가 된 아랫집 이웃은 눈치챘다. 그녀는 마이크가 오가는 발소리와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이크는 좋은 사람이야. 당신은 그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고 있어. 죄책감은 느끼지 마.”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아이를 가진 적도, 원한 적도 없다. 그러나 마이크의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즐거웠다. 나는 집에서 일했기 때문에 학교가 쉴 때나 여름 방학 때 아이들을 봐주기가 쉬웠다. 나는 수영 레슨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었다. 아이들과 같이 볼링, 미니어처 골프 등을 하러 갔다. 아이들이 내게 ‘스폰지밥’을 알려주었다.

마이크는 늘 수입이 빠듯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있어 돈이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이크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즉 자신의 시간과 관심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한번은 아들들과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과학 박물관 회원 가입을 시켜주었다. 롤러블레이드 타는 법, 하키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나는 주말에 그들과 함께 하이킹도 다녔다. 나는 개와 점심 도시락을 지참했다. 마이크의 아내는 절대 같이 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마이크와 아내가 집을 살 수 있도록 계약금을 빌려주었다. 그의 가족을 위해 긍정적인 일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의 아내가 상환 계획을 짰고, 계획대로 지켰다. 마이크는 새 집의 지하실을 작업실로 개조했다. 다른 동네에 살게 되었어도 마이크는 계속 우리 집에 들렀다.

모든 게 무너진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늦은 밤의 방문도, 홈 데포 쇼핑도, 그가 자발적으로 해주던 멋진 발 마사지도 사라졌다는 것만 알 뿐이다. 마이크는 작별 인사 없이 그냥 사라졌다. 내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는 나를 블록했다. 우리는 싸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홧김에 떠나버린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답을 원했던 나는 용감하게(그리고 어리석게) 마이크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마이크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마이크는 당신 얘기는 전혀 안 해요.” 아내의 말이었다.

우리의 기차 여행이 종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진짜 남자친구였다. 함께 극장이나 레스토랑에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토요일 밤에 찾아오기를 기다리게 만들지 않는 사람, 결국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친구와 동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게 시간을 내줄 수 있는 사람.

4년 뒤 어느 날 오후에 마이크를 보았다. 나는 개를 산책시키며 숲 근처의 야구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이크는 홈 플레이트에 선 아들들에게 소프트볼을 던져주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내게로 왔다. 레드 삭스 모자를 벗으며 “흰머리가 늘고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는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

“아빠, 빨리 와요.” 아들들이 외쳤다. 마이크는 그 말을 듣고 투수 마운드로 다시 뛰어갔다.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질문을 던지고 짐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

이 시나리오를 예측할 수 있었어야 했다. 1990년대에 나는 딥 사우스[보수적인 최남동부 지역]에 살았다. 우리 동네 YMCA의 스팀 룸과 사우나는 게이 남성들이 일을 마친 후 들르는 사교 클럽 구실을 했다. 그들에겐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가끔 나는 그들에게 왜 결혼했는지 물었다. 보통 “가족을 원했어. 아이를 갖고 싶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녀를 두고 가족에게 헌신하는 한 남성에게 민주당 지지 주로 옮길 수도 있는데 왜 남부에 머무르는지 물은 적도 있다. “나는 엄마 아빠한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못 살아.”라고 그는 대답했다.

1980년대에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 게이 극단 기획자를 알고 지냈다. 어느 날 밤 그는 트레이더 빅스에서 게이 친구들을 위한 디너 파티를 열었다. 트로피컥 칵테일을 마시며 그는 두 딸을 둔 이혼녀와 약혼했다고 선언했다. “난 이제 가족을 가질 거야. 이제 너희들은 못 만나.”

마이크의 아내가 보낸 분노의 이메일에 답신하지 않았다. 그건 마이크의 일일 것 같았다. 그녀에게 커밍아웃하고 우리 이야기를 한 사람이 마이크이니 말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만났는지, 마이크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불안해 하며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야구장에서 만난 이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지독한 이혼 과정을 겪고 있어. 나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했어. 내 자신이 되어야만 했어. 아내에게 우리 이야기를 했어. 아내는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려. 아내는 내가 얼마나 많은 남성들을 만났는지 알고 싶어했어. 너밖에 없었다고 말했고, 그게 사실이야.” 마이크의 답이었다.

“네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네 생각이 나. 네가 보고 싶었어.”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라고 답했다.

“아들들도 알아?”라고 물었다. 이제 성인일 것이다.

“말했어. 애들은 잘 받아 들였어.”

“넌 걔들의 훌륭한 아버지였어.”

“너 때문에 울 것 같다.” 그의 답이었다.

마이크는 세라피를 받는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양성애자 남성 지원 단체에 가입했다고 한다. 거기서 한 남성을 만났는데, 매력적이라고 느꼈고 그가 마이크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했다.

나는 찌릿한 슬픔을 느꼈다. 마이크에게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삶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내 삶도 새로워졌다. 나는 집을 팔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캘리포니아 사막으로 이사했다. 작은 아파트를 사고 몇 주 뒤에 페인트 가게에 가서 컬러 샘플을 보았다. 40대 초반의 남성 점원이 안내해 주었다.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주차장에서 차로 가고 있는데 그가 나를 잡았다. 급히 휴대전화 번호를 쓴 노란 종이를 건넸다.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만 주세요. 뭐든지.”

“당신 결혼했잖아요.” 내가 말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밤은 외로울 수 있다. 그의 제안은 유혹적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노란 종이를 꺼내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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