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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로 그만둔 '자발적 퇴사자'는 실업급여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인격모독과 비하에 시달리다 퇴직을 선택해도 안전망이 없다

ⓒ뉴스1

서울 강남의 한 중소기업 아이티(IT) 회사에 다니던 전명신(가명·36)씨는 지난해 말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팀장의 갑질이 이유였다.

팀장은 팀원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팀장은 팀원이 실수하면 “네가 모든 걸 망쳐놨다” “네가 이걸 견디지 못하면 너는 낙오자”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마우스를 던진 적도 부지기수다.

전씨는 팀장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몸이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공황장애가 왔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게 됐다. 1년 정도 이어진 갑질을 견디다 못한 전씨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전씨는 13년 동안 업계에서 일하면서 꼬박 고용보험료를 냈다. 그러나 전씨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고용보험 가입자는 고용보험을 적용하는 사업장에서 18개월 동안 180일 이상 근무하다 회사 경영사정 등으로 인해 권고사직이나 정리해고될 경우에만 이직일 이전 평균 임금의 50%를 실업급여로 받을 수 있다.

자발적으로 퇴사한 이들은 건강 문제, 임금체불 등 법이 규정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입증되지 않으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전씨의 경우 근로기간과 평균 급여 등을 바탕으로 실업급여 계산을 해보니, 210일 동안 하루 6만원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7개월 동안 받을 수 있는 월평균 180만원 상당의 실업급여가 ‘물거품’이 된 셈이다. “퇴사하면서 팀장에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권고사직 처리를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또 다른 갑질이 두려워 결국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팀장 밑에서 일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퇴사한 건데, 왜 실업급여조차 받지 못하는 걸까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1일 임시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실업급여를 확대해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동시에 노동유연성을 높여야 한다고 밝혀 노동계의 비판을 사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회안전망 확대를 위해 ‘고용보험 안팎의 사각지대’부터 우선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업급여 제도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발적인 퇴사를 하는 노동자들을 껴안지 못하는 데다, 특수고용노동자처럼 아예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 아닌 이들도 수백만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노동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상담을 신청한 김우재(가명)씨도 1년 넘게 사장의 인격모독과 비하 발언에 시달렸다. 지난해 10월 사장은 김씨에게 폭언과 함께 “같이 일 못 한다. 나가라. 사직서를 내고 퇴사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김씨는 ‘회사에서 사직서 제출 뒤 퇴사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제출하자 회사는 사표를 반려했다. 이후 사장은 틈만 나면 김씨를 회의실로 불러 “왜 일을 독단적으로 하냐”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더 심한 폭언을 해댔다.

근무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지 못 하게 한 것은 물론, 왕따 취급을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구토와 설사가 반복되면서 건강도 상했다. 결국 참다못해 지난 1월초 다시 한 번 사직서를 제출했고, 회사는 김씨를 ‘자진퇴사’로 처리해 실업급여 수령을 막았다.

현행 고용보험법상 노동자가 퇴사하면 사업주는 이 사실을 증명할 고용보험상실신고서 및 이직확인서를 사업장 관할 근로복지공단 지사로 신고해야 한다. 이때 고용보험 피보험 자격 상실 이유, 즉 회사가 ‘퇴사 이유’를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노동자의 실업급여 수급 여부가 결정된다.

회사의 갑질을 버티다 못해 사실상 비자발적으로 퇴사해도, 회사가 ‘자발적 퇴사’라고 신고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만약 공단의 결정에 이의가 있는 경우 노동자는 직접 관할 지방 고용보험 심사관에게 심사를 청구해야 하는데, 갑질로 인한 퇴사일 경우 입증 책임은 노동자 본인에게 있다.

심지어 회사에서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권고사직으로 처리하면, 정부가 지원하는 각종 인건비 지원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어떻게든 노동자들의 퇴사를 ‘자발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예를 들어, 일자리 안정자금의 경우 지원기간 중 지원대상이 되는 노동자가 해고나 권고사직 등 비자발적인 사유로 퇴사하면 사업장 전체 지원금이 중단되고 다시 지원받을 수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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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퇴사로 실업급여 못받는 노동자 292만명

이런 상황 탓에 실업자 가운데 실업급여를 받는 비율을 일컫는 한국의 실업급여 수혜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참혹한 수준이다.

2017년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자발적 이직자에 대한 수급자격 인정에 따른 재정소요전망’ 보고서를 보면, 2016년 한해 퇴사로 피보험 자격을 잃은 640만9천명 가운데 고용보험 가입 기간 기준은 충족하지만, ‘자발적 퇴사’로 인해 실업급여 신청이 불가능한 실업자가 45.7%(292만7천명)에 달했다.

실업급여 수급자 비율도 40%에 못 미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해 11월 펴낸 ‘2018~2027년 고용보험 재정전망’에서 월평균 실업자 가운데 실업급여 수급자가 2017년 기준 36.6%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안전망연구센터 소장이 연구원 월간지 <노동리뷰>에 게재한 ‘근로 빈곤 특성과 한국형 실업부조 도입 방향’ 보고서에서도, 2016년 기준 한국 실업급여 수혜율은 37.3%이고, 저소득층은 이보다 더 낮은 10% 안팎인 것으로 나타났다. OECD 23개국 평균 수혜율은 69.7%다. 보고서는 실업급여 수혜율이 낮은 이유로 “고용보험 사각지대가 넓고 수급자격 요건이 엄격해서 실업급여 수급자가 적으며, 실업급여를 수급하지 못하는 취약 계층에 대한 실업부조 등의 보완적인 고용안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퇴직 사유를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가 쓸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는 목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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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동자 230만명도 고용보험 사각지대

‘자발적 퇴사’ 사각지대뿐 아니다. 제화공 정근태(58)씨는 40년 동안 일하며 한번도 고용보험에 가입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지난달 22일 제화공장에서 해고당할 때도 퇴직금은커녕 실업급여를 받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2017년 위암 선고를 받고 수술하느라 다니던 제화공장을 그만둘 때도 안전망 공백 상태에서 수입이 0원인 상태로 1년7개월을 견뎠다. 수술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다시 수입이 0원인 상태로 사회에 버려진 정씨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모아 놓은 돈이 어디 있겠나. 다른 일자리 구할 때까지 수입 없이 버텨야 한다”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5개월째 실업자인 45년차 제화공 최세환(66)씨도 “제화공은 근로계약서 1장 쓰지 않고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장이 해고를 하는 순간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고 말했다.

월급제가 아닌 만드는 신발의 개수에 따라 임금이 책정되는 개수임금제의 적용을 받는 제화공들은 신발 1족당 1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는다. 한달 평균 200만원도 안 되는 돈을 벌다 보니 실업자가 됐을 때 쓸 돈을 모아두기도 어렵다.

제화공 최경진(56)씨는 “한번 실직하면 보험과 적금 등 고정적인 지출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들과 같은 제화공, 화물차 운전기사와 방송 구성작가, 퀵서비스 등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특수고용노동자는 230만명(2015년 국가인권위원회 발표)으로 추산된다. 현행 고용보험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되는 자와 일부 자영업자에게만 적용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대표적인 실업급여 사각지대에 속한다. 민주노총 일반지부 제화지부에 소속된 조합원 710명 가운데 4대 보험에 가입된 숫자는 6명뿐이다.

2016년 3월 방송작가 유니온에서 실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를 보면, 628명의 응답자 가운데 고용보험 미가입자가 98.0%(615명)였다.

지난해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한정애 의원은 고용보험 가입 대상자에 특수고용 노동자를 포함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역 문화방송(MBC) 프로그램 작가 이아무개(40)씨도 최근 실업자가 됐다.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아 프로그램이 갑자기 조기 종영이 된 탓이다. 이씨 역시 고용보험 적용 대상자가 아니어서 실업급여는 받지 못한다.

이씨는 “15년째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프로그램 종영과 개편으로 1~2달씩 쉬는 기간이 왕왕 있었다”며 “2017년 9월에는 방송국 파업으로 6개월을 꼼짝없이 수입 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당시 이씨는 건강보험료 10만원 내기도 빠듯해 대출을 받아 생활했다. 2달째 수입 0원으로 살고 있다는 15년차 방송작가 박우진(가명·39)씨도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건강보험료 12만원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공단에 물어보니 2017년 소득에 준해서 책정된 건강보험료라고 하더라고요. 제 수입은 지금 0원인데…. 당장 내일이라도 ‘일하자’는 연락이 오면 바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모호한 상황이에요.”

방송작가들은 방송 1편당 임금이 지급되는 이른바 ‘편 페이’ 방식으로 급여를 받고 있다. 개편이나 조기 종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프로그램이 끝나게 되면 바로 실업자 상태가 된다. 불안정한 상태를 보호해줄 실업급여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실업급여 사각지대를 고용보험 밖에서 해소하려고 한다. 지난 6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사회안전망 개선위원회가 발표한 ‘한국형 실업부조’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힌 한국형 실업부조는 저소득층 구직자의 취업 프로그램 참여를 조건으로 1인당 50만원씩 최대 6개월 동안 구직촉진수당을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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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실업부조, 필요하지만 한계도 뚜렷

전문가들은 한국형 실업부조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한계가 뚜렷하다고 지적한다. 이주하 동국대 교수(행정학)는 “한국형 실업부조는 고용보험법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의 구직활동을 긴급 지원하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다”면서도 “실업급여 수급 사각지대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용보험의 실업급여 보장성을 확대하면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 문제 해결까지 함께 이뤄져야 한다. 특히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고용보험 편입을 위한 고용보험법개정안 등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데 이런 법안들의 통과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아울러 “선진국은 전통적 노동자 고용 형태나 임금 체계가 다른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사회보험 혜택을 줄 때 기존 근로자의 개념을 새롭게 해석해서 법안에 적용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도 기존의 근로자 개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실업부조는 고용보험 가입 이력을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개선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최근 제도가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고용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보수체계도 그만큼 다양해지고 있어서 현행 고용보험법의 실업급여 수급요건을 특수고용노동자와 플랫폼노동자 등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들을 고용보험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선 현재의 들쑥날쑥한 임금 체계를 손보는 노력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자발적 이직자들에게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제도 개선이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제공한 ‘주요국의 자발적 이직자 실업급여 지급 현황’을 보면, 한국 포함 41개국 가운데 27개국이 자발적 퇴사자에게도 실업급여를 지급한다. 이들 국가는 다만 지급유예나 기간 단축 등 수급 기간에 제한을 두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홍영표 원내대표가 11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노사 상생 모델로 제시한 덴마크도 자발적 퇴사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대신 수급권을 3주간 정지하는 제한을 둔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 3개월 이상 실직 중인 자발적 실업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현재 홍영표 의원 등이 자발적 이직자에게도 실업급여를 지급하도록 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장인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2016년 기준으로 실업자 중 자발적 이직자가 60%가 넘어 비자발적 이직자 수보다 많다”며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절반 이상의 근속 기간이 1년 미만으로, 이미 우리나라는 고용 불안정 사회다. 그런데도 자발적 퇴사자들에게는 실업급여가 지급되지 않으니 이들이 퇴사 뒤 한두 달만 지나면 돈이 바닥나 결국 질이 낮은 일자리로 취직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안정적인 일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기술 등을 연마하는 등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퇴사 이유와 상관없이 모든 실직자에게 충분히 실업급여가 지급돼야 한다”며 “직업훈련과 구직활동, 구직상담 등 자발적 이직자에 대한 실업급여 수급요건을 강화한다면 일각에서 제기되는 도덕적 해이 논란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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