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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없으면 비핵화도 없다

선(先) 신뢰 구축으로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

ⓒNguyen Huy Kham / Reuters
ⓒhuffpost

대한민국 국민 10명 중 6명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고, 일주일 후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다.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응답(64%)이 ‘결국 포기할 것’이란 응답(28%)을 압도했다.

하노이에서 김정은은 “비핵화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런 의지가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긴 하지만,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그럼에도 국민의 절대 다수가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는 건 왜일까.

북한에 대한 불신 탓도 있겠지만, 국민의 상식적 판단이 그렇다고 봐야 한다. 나부터도 그렇다. 조건이 맞으면 포기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설마 그럴까’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어쩔 수 없다. 어떻게 완성한 핵 무력인데, 체제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 발전을 도와주겠다는 미국의 약속만 믿고 섣불리 포기할 수 있을까. 비핵화 과정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핵무기나 핵물질 일부를 빼돌려 숨기려 하지 않을까.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상식을 가진 대다수 국민의 생각일 것이다.

하노이에서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중 일부 핵심적인 제재의 해제를 요구했다. 트럼프의 대답은 ‘노(No)’였다. 영변 핵시설 폐기가 큰 카드인 건 맞지만, 사실상의 전면적 제재 해제와 맞바꿀 정도는 아니란 것이다. 거래를 원한다면 영변 이외의 핵시설과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도 폐기 대상에 포함하라고 받아쳤다. 미국의 국내정치적 요인 탓에 트럼프가 ‘빅딜’을 집어 들면서 갑자기 판이 커진 꼴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을 계기로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는 종래의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 입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실효적 수단은 강력한 제재뿐이라는 판단 하에 추가 제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일부 예상대로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를 내세워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린다면 대화 국면은 중단되고, 경제·군사적 최대 압박 국면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의 봄이 허무하게 끝나면서,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올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실현 가능하냐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불가능하다는 게 미국 내 전문가들, 행정부와 주류 정치권 인사들, 정보 당국 수장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렇다 보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란 비현실적 목표에 집착할 게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목표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완전한 비핵화 대신 제한적 핵 보유를 허용하자는 주장마저 워싱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 비확산 소위 위원장인 브래드 셔먼 의원(민주)은 “김정은이 모든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철저한 감시를 전제로 제한된 수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는 대신 미사일 기술 관련 프로그램을 동결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앞서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가 불가능한 현실을 인정하고, 북한에 10~20개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되 더이상 핵무기나 운반수단을 개발하지 못 하게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DNI)이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리언 페네타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비슷한 입장이다. 북한이 보유한 단·중거리 핵미사일의 인질이 된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북·미 정상은 “상호 신뢰 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70년 가까운 불신과 적대 관계의 산물인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셈이다. 양측이 서로 신뢰를 쌓아감으로써 북한 스스로 핵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법이다. 북·미가 공동으로 영변 핵 단지를 해체하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상호 신뢰 구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노이의 합의 실패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빅딜을 통해 일괄타결을 하더라도 비핵화의 실제 이행에는 긴 시간이 걸리고, 수많은 난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신뢰 없이는 비핵화의 진전이 어렵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인 줄 알면서 계속 매달리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선(先) 비핵화에서 선(先) 신뢰 구축으로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 북핵 딜레마에서 벗어나 완전한 비핵화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상자를 깨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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