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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08일 16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3월 08일 16시 49분 KST

자매애로 진화하는 여성팬덤

K팝 걸그룹 판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huffpost

지난달 미국에서는 발렌타인데이가 갤런타인데이(Galentine’s Day, Girl과 발렌타인데이 합성어)에 밀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성들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발렌타인데이(2월 14일) 대신 여자친구에게 초콜릿을 주며 우정을 나누는 갤런타인데이(2월 13일)가 새로운 기념일로 자리 잡아 간다는 얘기다. 갤런타인데이란 말은 2010년 NBC 시트콤 ‘파크스 앤드 레크리에이션(Parks and Recreation)’에서 여자친구들끼리 브런치를 하면서 처음 쓰였다.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자매애가 뜨고 있다는 증거라고 외신은 소개했다.

지난달 그래미 시상식에서도 자매애는 화두였다. 백인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그래미로서는 이례적으로 ‘자매들’이 오프닝을 장식했다. 14년만의 첫 흑인 여성 진행자로 나선 알리샤 키스가 미셸 오바마 전 대통령 부인, 가수 제니퍼 로페즈·레이디 가가, 배우 제이다 핀켓 스미스와 무대를 꽉 채웠다. 키스는 “여성분들이 보여준 빛과 사랑의 메시지, 자매애에 너무 감사드린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우리 문화계에서는 ‘자매팬덤’의 부상이 눈에 띈다. 흔히 남성 아이돌의 열성팬으로 분류되던 젊은 여성들이 또래 동성 스타에게 열광하는 것을 넘어 40~50대 중장년 ‘언니’ ‘이모’ 스타들에게까지 열광한다. 아이돌 팬들처럼 이들의 동선을 쫓아다니고 인터넷에 영상과 사진을 찍어 올리며 ‘덕질’을 한다. 인기투표에 참여해 조직적인 활동도 벌인다. ‘오빠’ 아닌 ‘언니’를 외치는 ‘언니부대’의 출현이다.

최근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40대 배우 염정아와 김서형은 포상휴가차 공항에 갔다가 의외의 풍경을 만났다. 젊은 여성팬들의 환호가 아이돌을 뺨쳤다. 아이돌의 공항 출국 장면에나 나오는 ‘대포카메라’(열성팬들이 쓰는 전문가형 카메라)까지 등장했다. 염정아도 “아이돌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전에 없이 젊은 여성팬들이 늘었다. 이들은 엄마팬들과 달리 현장까지 응원을 오고 적극적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해준다”고 말했다. 김서형, 오나라가 출연한 JTBC 예능 ‘아는 형님’도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였다. 노래방 마니아라는 김서형이 막춤을 추고 노래 부르는 장면이 인기 ‘짤’로 SNS를 도배했다. 김서형은 2년 전 액션영화 ‘마녀’로 칸영화제에 갔을 때, 탄탄한 복근을 드러낸 사진마저 뒤늦게 화제가 됐다.

이 분야의 대표주자는 단연 지난해 영화 ‘허스토리’의 김희애다. 1998년 일본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유일한 위안부 재판인 ‘관부재판’을 다룬 실화 영화다. 조기종영의 운명에 처한 영화를 여성 관객들이 응원상영회 형식으로 구해냈다. 영화에 대한 지지가 주인공 김희애에 대한 지지로 옮아갔다. 40~50대 주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워너비 스타였지만, 20~30대 젊은 여성팬덤은 이례적이다. 김희애 역시 “젊은 여성팬들의 열기를 처음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그 외 드라마 ‘미스티’의 김남주, ‘시크릿 마더’의 송윤아도 등장하는 행사장마다 여성팬들의 함성을 몰고 다닌다. 여성이 주도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며, 주체적이고 당당한 캐릭터, 나이를 잊은 세련된 외모가 공통점이다. 그저 개인에 대한 호감을 넘어 멋진 여성상을 응원한다는 뜻이 강하다. ‘허스토리’를 보고 김희애와 60대 배우 예수정의 열혈팬이 됐다는 한 여대생은 “한국에서 여성 스타들이 나이 먹는 것은 죄악이다. 40대 남배우가 20대 여배우와 로맨스 파트너로 나오는 건 당연하고, 반대는 아직도 대서특필된다. 금기를 깨고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말했다.

자매팬덤의 출현은 K팝 걸그룹 판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걸그룹은 남성팬, 보이그룹은 여성팬을 타깃으로 하는 게 보통인데, 적극적으로 여성팬을 겨냥한 걸그룹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음원 구매 등 문화소비 시장의 큰손은 단연 남성 아닌 여성이라, 여성팬을 노리는 것이 수익으로도 이득이다. 당당한 걸크러쉬가 아예 성공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 JYP의 새 걸그룹 ‘잇지’, 큐브엔터테인먼트의 신인 ‘(여자)아이들’, 솔로 변신에 성공한 청하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걸그룹의 전형인 귀엽고 청순한 소녀 아니면 노골적인 섹스 어필 이분법을 벗어났다. 데뷔 직후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잇지’는 “네 기준에 날 맞추려 하지 마. 난 지금 내가 좋아하는 나야…예쁘기만 하고 매력 없는 애들과 난 달라”(‘달라달라’) 등의 ‘자기 선언’으로 여성팬들을 사로잡았다.

걸그룹들이 남성팬보다 여성팬 지향으로 선회하는 데는 여성 아이돌의 인권 문제도 숨어 있다. 남성팬들이 다수인 걸그룹에서는 종종 악성팬들에 의한 성희롱, 과도한 성애화가 일어난다. 중소기획사일수록, 신인일수록 속수무책이다. ‘여자 아이돌=극한직업’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최근 걸그룹 러블리즈는 인터넷 생방송 중 일부 팬들의 성희롱성 발언 때문에 한 멤버가 욕설을 했다가 ‘태도 논란’에 휘말렸다. 여자친구의 팬사인회에서는 몰카안경을 낀 남성팬이 적발되고, 우주소녀의 팬사인회에서는 남성팬의 음주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악성팬은 남녀가 따로 없지만 여성팬이 남성 아이돌을 성희롱하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여성들이 주머니를 적극적으로 여니 장기적 활동을 위해서는 여성팬덤 확보로 선회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