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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마블’과 나이키의 도발

나이키 광고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 안의 편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huffpost

“내가 왜 당신에게 나를 증명해야 하지?”

6일 개봉한 마블 스튜디오의 최신작 <캡틴 마블>의 마지막에 주인공 여성이 스승에게 던지는 이 대사는 함축적이고 강렬하다. 더 이상 남자들의 눈에 드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최근 유튜브에 공개된 나이키 광고는 정확히 이 대사를 1분30초의 역동적인 영상으로 풀어냈다. 운동을 갓 시작한 어린 선수들부터 서리나 윌리엄스 같은 톱스타 선수까지 숨가쁘게 등장하는 이 광고의 내레이션을 줄여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면 호들갑스럽다고 한다. 우리가 남자들과 대결하고 싶어하면 ‘또라이’(nuts)가 된다. 우리가 (심판에게) 반박하면 불안정하다고 하고, 우리가 너무 잘해도 뭔가 이상하다고 하고, 우리가 화를 내면 신경질적이라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마라톤을 뛰는 여자들도 미쳤다고 했고, 복싱을 하는 여자도, 덩크슛을 하는 여자도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누가 네게 미쳤다고 해도 괜찮아. 미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줘.”
이미 한국 TV 광고에서 여성들이 젠더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치열하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줘 호평을 받은 나이키지만 이 광고는 ‘너의 위대함을 믿으라’는 메시지에서 성큼 더 나가 ‘남성들의 시선에 갇혀 너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내보인다.

페미니즘 학자도 아니고 여성주의 사회운동가는 더더욱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첨병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 스포츠 브랜드 광고가 이렇게 앞서 나갈 수 있다니 놀랍다. 사실 나이키 광고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굳게 믿어온 내 안의 편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기에 지고 눈물을 많이 흘리는 여성 선수를 보면 속좁은 여자 같다고 비난했고, 남자처럼 싸우고 남자처럼 항의하는 서리나 윌리엄스를 보면서 너무 거칠다고 비난했다. 물론 나도 할 말은 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단지 여자라 입사에서 탈락하고, 아이를 낳아서 승진에서 탈락하고, 남자 직원이 많기 때문에 여성 임원은 필요없는 존재인 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남성=권력인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은 남성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여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줄타기를 해왔다. 주로 남성인 상사나 업무 파트너에게 연락을 할 때는 언제나 “바쁘실 텐데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이라는 굽실 멘트로 시작했고(나도 바쁜데!!), 일 못하는 동기 남성이 나보다 먼저 승진해도 ‘그까이꺼 괜찮아’라는 쿨내를 풍겨야 이듬해 승진이라도 기약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여성 심리학자가 쓴 <내 안의 가부장>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성 안의 여성성도 남성성도 자체 검열하고 부정하게 된 여성의 내면화된 가부장성을 지적한다.

지금도 나는 “바쁘실 텐데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이라고 이메일을 시작하고, 많은 회사의 남성 상사들은 ‘공손하면서도 쿨한’ 여직원을 요구한다. 나이키 광고 댓글에도, <캡틴 마블> 평점에도 구시대 잔류파들의 안쓰러운 ‘총공’이 진행되고 있지만 세상의 도저한 흐름은 막을 수 없어 보인다. 트렌드와 돈의 움직임에 기민한 할리우드와 광고계가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 <캡틴 마블>의 예매율이 하늘을 찌르고 나이키 우먼스의 광고도 멈춤 없이 이어진다는 게 그 증거다. 그리고 구글은 나처럼 ‘죄송하다’를 달고 사는 여성들의 불필요한 습관을 고치기 위해 겸양의 구절을 쓰면 잘못된 맞춤법을 지적하듯이 빨간색 밑줄로 강조하는 지메일 확장 프로그램 ‘미안하지 않아’(Just not sorry)를 개발해 제공한다. 이제 이십년 습관을 고칠 때도 됐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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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페미니즘 #나이키 #캡틴마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