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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대선에 임하는 조 바이든의 가장 큰 적은 조 바이든이다

바이든 전 부통령은 상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공화당과 기업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 허완
  • 입력 2019.03.09 10:00
ⓒHUFFPOST ILLUSTRATION; SCOTT OLSON/GETTY IMAGES

미국 민주당 유권자들은 2020년 대선 후보로 누가 적합할지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 초기 설문 조사에서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선두주자로 앞서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꺾을 수 있는 적임자라는 믿음 때문이다. 바이든은 2018년 중간선거 마지막 몇 주 동안 트럼프가 우세를 보였던 중서부 주들을 돌며 보냈다. 폴리티코는 이를 가리켜 ”워킹 클래스 위스퍼러 투어”라고 불렀다. 바이든은 자신이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튼 출신임을 강조하며 가는 곳마다 자신을 ”중산층 조(Middle-Class Joe)”라고 내세웠다. 다른 민주당원들이 보내 준 ”함께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활용한 듯했다.

″소탈한 조(folksy Joe)”는 심지어 자신은 ”벨트 버클부터 구두 버클까지 노동자”라고까지 말했다. 세심하게 만들어낸 이 이미지에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조 바이든의 전체 커리어.

40년 가까이 상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바이든은 금융계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열렬히 지지해왔다. 지금 민주당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포퓰리스트적 생각과는 배치되는 입법적 승리를 거두기 위해 월스트리트, 정치적 우파와 동맹을 맺었다. 바이든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면, 자신이 표방하는 정치와는 멀어진 민주당 유권자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Chris Maddaloni via Getty Images

 

테드 케네디와의 싸움

민주당에게 있어 1972년 총선은 재앙이었다. 바이든은 당시 민주당의 몇 안 되는 승리 지역이었던 델라웨어에서 초선 상원의원이 되어, 1973년에 처음으로 워싱턴 D.C. 정계에 진출했다. 초선 의원들 대부분이 그렇듯, 처음 몇 년 간은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30세였던 그는 상원 출마 제한 연령을 간신히 통과했다. 형의 상원 의석을 가져왔던 1962년의 테드 케네디보다도 젊었다. 경험이 없었던 바이든은 케네디를 우러러보며, 거의 친형을 대하듯 했다.

하지만 케네디가 민주당 고위직에 오르자, 이들은 민주당 경제 아젠다를 놓고 충돌했다.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이 올해 법사위원장이 되자, 독점금지법 활동가들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1979년 뉴욕타임스 기사다. 케네디는 합병된 기업의 전체 규모에 따라 법인합병을 금지하는 법안을 도입할 생각이었다. 상관없는 업계의 재벌기업이라 하더라도, 합병으로 해당 기업이 특정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늘어나지 않더라도(즉, 독점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금지 조항을 적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곧 바이든과 부딪혔다. 코카콜라가 의원들에게 청량음료 업계는 독점금지법 예외 대상으로 지정해 달라고 촉구하자, 바이든은 공화당 의원들과 손을 잡고 이를 도왔다. 케네디와 독점 전문가인 카이 유잉 법무장관의 반대를 무릅썼다. 유잉은 이 법은 ”특정 이해관계에 관한 법”이라며 이를 지지할 ”근거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독점금지법은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노조에서 대기업 쪽으로 끌어오려는 25년간에 걸친 분투의 초기 행동에 불과했다. 바이든과 케네디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두 사람의 투표 기록들로 알 수 있는 정책적 함의를 넘어선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케네디는 법사위를 통해 뉴딜 시절과 같은 기업 권력에 대한 공격을 하고 싶어했다. 바이든은 그전까지는 공화당의 몫이었던 기업 이익 대변자가 되었다.

‘코카콜라 법’을 놓고 케네디와 맞서던 바이든은 소비자들이 독점금지법 위반 행위에 대한 광범위한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려던 케네디의 노력에도 제동을 걸고 나섰다. 1977년에 대법원은 제품을 구입한 사람만이 독점법 위반으로 해당 기업을 고소할 수 있다는 논쟁적 판결을 내렸다. 이는 즉 도매상을 통해 제품을 판매하는 제조사들은 소비자가 아닌 도매상에 의해서만 고소당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케네디는 이 판결을 뒤집을 법을 준비했지만, 바이든은 공화당원들과 손을 잡고 케네디를 ”짜증나게”’(뉴욕타임스의 표현) 했다. 바이든은 당 지도부에 저항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법사위의 민주당 의원 10명 중 이 법에 반대한 사람은 2명 뿐이었다. 다른 한 명은 앨라배마의 보수적 민주당원 하월 헤플린이었다. 케네디가 찰스 매티아스 상원의원(공화당-메릴랜드)의 표를 끌어오기 위해 막판에 양보를 한 덕분에 이 법은 간신히 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본회의에는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케네디의 독점금지 야심도 이와 함께 죽어버렸다.

바이든이 외로운 늑대는 아니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과 워터게이트 이후 워싱턴에 몰려든 여러 젊은 민주당 의원들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시절부터 민주당의 사상을 지배해 왔던 진보적 정통성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심지어 케네디마저도 1978년에 카터를 압박해 항공업계 규제를 완화하도록 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시작한 규제 완화의 시대보다 거의 3년 앞선 일이었다.

“우리 여럿은 둘러앉아 보수적으로 투표할 방법들을 생각해냈다. 진보층에게만 지지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이든이 1974년에 워싱터니언에 한 말이다. “시민권과 시민 자유에 대해서는 난 진보지만 그것뿐이다. 나는 다른 대부분의 이슈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꽤 보수적이다.”

바이든은 진보 단체들에겐 혹평을 받았다. 1978년, 당시 가장 앞서가던 진보 감시단체 ‘민주행동을 지지하는 미국인들(Americans for Democratic Action)’은 바이든에게 고작 50점을 줬다. 일부 공화당원이 받은 것보다 더 낮은 점수였다. 케네디는 늘 그렇듯 90점대를 받았다.

바이든의 점수는 1980년대 진보적 외교 정책 이력 때문에 점수가 올라갔다. 그러나 학교 내 인종차별 폐지(school integration)부터 세금 정책에 이르는 국내 정책에 있어서, 바이든은 사실상 공화당 레이건 정부의 편이었다.

바이든은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50%로 낮추고, 여러 부자 가문을 불로 상속세에서 제외해주는 레이건의 역사적인 세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이 법으로 인해 연방정부의 세수는 연간 약 830억 달러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다음 바이든은 이 세법에 의해 생긴 적자를 줄이기 위한 사회보장 예산 동결을 주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가혹하지만, 적자가 치솟는 것을 멈출 유일한 방안이다.” 바이든이 상원 본회의장에서 했던 말이다. 그는 적자가 치솟아서 18개월 안으로 “어마어마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든이 1987년에 처음으로 대선에 도전했을 때, 그는 레이건의 반정부(‘작은 정부’) 메시지 상당부분을 수용해 민주당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정부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최종 분석에 의하면 정부는 촉매 이상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다.” 바이든이 선거 유세에서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우리 관리자들, 우리 근로자들, 우리 소비자들이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ASSOCIATED PRESS

 

클린턴 혁명 전사

바이든은 몇 달 만에 1988년 대선 경쟁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연설 표절 스캔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빌 클린턴에게 흘러들어갔다. “나는 사실상 클린턴이 1992년에 내세운 공약을 내세워 1987년에 출마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바이든은 2001년 내셔널저널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클린턴 시절에 대한 비판을 공허한 “계급 전쟁과 포퓰리즘”이라고 일축했다.

그 공약의 주요 요소 중 하나는 복지 개혁이었다. 직업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적 지원을 끊어서, 심각한 빈곤을 더욱 악화시키는 정책이었다. 이 계획은 대부분의 빈곤층 가정들이 겪는 한계를 무시한 것이었다. 이들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교통 수단이 없거나, 돌봐야 할 어린 아이들이 있거나, 아니면 그저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불황기에는 특히 심각한 문제다). 1996년의 복지 개혁 투표는 민주당을 분열시켰다. 민주당 상원의원 중 23명은 찬성, 23명은 반대였다. 바이든은 지지였다. 클린턴은 단결한 공화당의 지원에 힘입어 이 법안에 서명할 수 있었다.

바이든은 클린턴 시절 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지도록 만든 경제 아젠다의 확고부동한 지지자였다. 빈곤층과 중산층이 소득 1% 증가로 얻는 추가 이득은 미미한 반면, 애초에 버는 돈이 없다시피 한 사람에게 있어 소득 2.5% 증가 역시 큰 의미가 없다. 반면 부동산 및 금융 투자에 따른 자본에 대한 소득세를 인하한 덕분에 부유층의 재산은 불어났다. 클린턴 정부가 1993년 예산안에서 소득세 최고세율을 36%에서 39.6%로 높이긴 했지만, 1997년 감세에 따른 경제적 이득은 부유층에 크게 집중되었다. 그 결과 상위 1%가 미국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적으로 높아졌다. 바이든은 이 모든 정책에 찬성표를 던졌다.

동시에 획기적인 은행 규제완화는 일부 거물들의 손에 국부를 더욱 집중시켰다. 바이든은 은행들이 주 경계를 넘어 확장할 수 있게 하는 ‘리글-닐 주간 은행법 지점설치 효율성법(Riegle-Neal Interstate Banking Act)‘을 지지했다. 그는 대공황시대에 생긴, 전통 상업 은행들이 위험한 증권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글래스-스티걸법(투자·상업은행 분리법) 핵심 조항 폐지에 찬성했다. 이 법들이 통과되면서 월스트리트에서는 은행 간 초거대합병이 일어났고, 훗날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주인공이 될 시티그룹, 웰스파고 같은 거대 기업들이 출현했다. 바이든은 또 연방 및 주 차원의 크레딧디폴트스왑(CDS) 감독을 금지하는 법안을 찬성했는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금융적 대량 살상 무기”가 되었다.

ⓒBloomberg via Getty Images

 

민주당의 변화

흐트러진 야당 공화당에 대한 정책적 승리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민주당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였던 1990년대에, 바이든이 던졌던 표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다. 1997년 클린턴의 감세에 반대한 상원의원은 고작 3명, 글래스-스티걸법 폐지에 반대한 의원은 8명 뿐이었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인해 이 모든 정책들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2016년, 바이든 본인도 글래스-스티걸법 폐지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후회라고 말했다.

또한 바이든은 10여년 동안 파산법 개정안을 추진했다. 개인 파산 자격을 더욱 염격하게 강화한 이 법으로 빚에 쪼들리는 가정의 채무 탕감 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 더 어렵게 됐다. 당시 학자였던 엘리자베스 워렌은 바이든의 파산법이 실직과 의료 비용으로 고생하고 있는 가정들의 돈을 신용카드 회사에게 안겨주는 법이라고 경고했다. 클린턴 시절의 규제 완화와는 달리, 파산법은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31 대 14로 패했다.

오바마 시절, 바이든은 그 중 일부에 대해 속죄했다. 그는 은행들이 투기성 고위험 증권에 투자해 납세자들의 돈으로 이득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한 논의에 개입해 대통령의 지원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또한 오바마는 공화당 하원의원들과 ‘그랜드 바겐’을 얻어내는 데 바이든을 투입하기도 했다. 민주당이 사회보장 예산 장기 삭감을 수용하는 대신, 부유층에 대한 약간의 증세를 얻어내는 내용이었다. 바이든이 의회에 있을 때 지지했던 거의 모든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양당의 중도파 엘리트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바이든의 ‘평범한 조’라는 주장의 근거는 오직 개인적 배경 뿐이다. 노동 계급 성장 과정, 워싱턴이 ‘진정성‘이라고 해석하는 거친 남성적 말투다. 하지만 그의 정치는 늘 경제에 대한 엘리트적 가설에 기반해 왔다. ‘적자는 나쁘다, 규제 완화는 현명하다, 정부는 기껏해야 경제적 번영의 어설픈 집사에 불과하다.’

금융위기로 인해 이같은 생각들의 신빙성은 크게 떨어졌음에도 바이든은 이를 떨쳐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민주당 유권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바이든이 1970년대부터 등을 돌렸던 노골적 진보주의는 크게 되살아났고,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민주당원들도 나왔다. 민주당의 모든 (진보적) 정책적 에너지는 당의 전통적 이념을 넘어섰다. 심지어 오바마 시절조차 넘어섰다. 적자에 대한 의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린 뉴딜(Green New Deal)‘, 모두를 위한 건강보험(Medicare for All)’, 억만장자 계급의 정치 권력에 대한 다양한 공격들이 나왔다. 바이든의 행적은 민주당이 현재 우선시하는 것들과는 동떨어져 있다.

민주당 경선 유권자들이 이를 중요하게 생각할까?

“선거 승패에 있어서 (정책적) 이슈들이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이든이 1974년에 워싱터니언에 한 말이다. “나는 이슈들은 그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유권자들이 당신의 정직함과 공정함을 판단하게 해 줄 수단이다.”

바이든은 2020년에 그 이론을 시험해 볼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을 것이다.

 

* 허프포스트US의 Joe Biden’s Biggest 2020 Problem Is Joe Biden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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