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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천 "최저임금이 자영업자 발목? 월세·대기업이 더 큰 문제”

11개 식당 중에 2곳만 남고 폐업하게 된 이유를 풀어놨다

  • 박세회
  • 입력 2019.03.02 15:00
  • 수정 2019.03.02 15:02
ⓒ사진 강현욱(스튜디오 어댑터)/한겨레

2월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이탈리아 음식점 ‘마이스카이’. 이 식당의 천장에 달린 오색 모빌이 창가로부터 바람이 일 때마다 달그락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국 전통의 자개장과 인도풍의 보랏빛 커튼이 식당 한쪽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배우 홍석천(48)씨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이날 김성일 스타일리스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나타난 홍씨는 검은색 뿔테 안경에 맵시 있는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다.

1월21일 <교통방송>(tbs)의 시사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홍씨는 “최근 이태원에서 운영하는 식당 중 두 곳의 문을 닫았다. 폐업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몇몇 매체에서 마치 최저임금 때문에 문 닫았다는 식의 내용으로 기사화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날도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최저임금의 상승이 자영업자의 발목을 붙잡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속마음을 김성일씨가 더 두드려봤다. 홍씨는 지난 16년간 외식업계에서 고민해왔던 생각들을 차분히 꺼냈다.

ⓒ사진 강현욱(스튜디오 어댑터)/한겨레

김성일(이하 김) 홍석천씨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이지만, 실제 인생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아요. 운명적인 사건을 만나 이렇게 외식업계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잖아요.

홍석천(이하 홍) 2000년 9월, 우연찮은 계기로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게 된 일을 말씀하시는 거죠?(웃음) 그 사건이 아무래도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죠. 

 그때 방송 일을 중단하고 외식업에 종사하기 시작해서 또 한번 화제가 됐잖아요.

 제가 중단한 게 아니라 끊긴 거예요.(웃음) 먹고살 길이 없어져 많이 불안했죠. 과거에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하면서 벌어놨던 돈으로 사 놓은 27평(89㎡) 아파트 한 채가 있었어요.

당시 전재산이었는데, 그걸 팔아서 이태원에 퓨전 음식점 ‘아워 플레이스’를 열었죠. 당시 방송 일을 못 할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식당 일은 처음이라 한 4년을 고생했어요. 실은 장사가 잘 안 됐거든요. 그러다가 이태원에 타이음식점 ‘마이 타이’를 열고 대박이 났죠.

 대박 난 비결이 뭔가요? 

 시급을 다른 가게보다 두 배 이상 주고, 외모가 훈훈한 남성을 종업원으로 뒀어요. 일명 ‘꽃미남 마케팅’이었죠. 효과는 만점이었고요. 여성 손님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거든요.(웃음) 나중에는 서울 강남 일대에 잘나가는 레스토랑의 대표들이 몰래 그 훈훈한 직원들을 스카우트했을 정도였죠.

마침 타이 요리가 ‘핫’해질 때였던데다 노천식당은 흔치 않을 때라서 ‘힙’한 손님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어요. 그 식당 덕분에 이후 ‘마이 첼시’, ‘마이 타이차이나’ 등 ‘마이’라는 이름을 붙여 저만의 식당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여기까지 왔네요.

 오랫동안 이태원에서 외식업 하다 보니 ‘이태원 대통령’이라는 별명도 생겼지요.

 그만큼 자영업을 하는 유명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인 것 같아요.

 현재 전국에 총 11개의 식당을 운영 중이라면서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거의 폐업해서 2곳만 남았어요. 저 말고도 이 동네에서 식당 하시는 분 대부분 힘든 상황이에요.

 잘 안 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월세 증가, 대기업 등의 골목 상권 입점, 젠트리피케이션(골목 상권 임대료가 올라 저소득 임차인들이 외곽으로 쫓겨나는 현상)이 가장 큰 문제지만, 그건 복잡한 이해관계가 있으니 높으신 분들이 정책으로 풀어나가야 하고 제가 논할 상황은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만 외식업이든 뭐든 자영자들의 노력으로 어떤 동네가 뜨기 시작하면 그곳을 관할하는 구청 등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면 좋을 텐데,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아요. 자영업자가 당장 장사를 잘할 수 있게 현실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도 먼저 해줬으면 해요.

ⓒ사진 강현욱(스튜디오 어댑터)/한겨레

 어떤 게 있을까요?

 골목상권이 뜨면 사람은 몰리는데 골목이라는 특성상 주차할 공간이 매우 부족해요. 주차가 안 되면 손님들의 발길이 저절로 뜸해지거든요. 저녁이면 동네의 텅텅 비는 공간이 있어요.

하루 일과가 끝난 상점이나 우체국 같은 공공기관 앞이죠. 이런 공간을 한시적으로 주차장으로 운영하면 좋을 텐데, 구청에서는 주차딱지 끊기에 바쁘니까요. 밤에 죽어 있는 공간은 살리고, 은퇴하신 분들이 주차 관리하면 일자리 창출도 되고, 사람들은 골목으로 다시 모여드니까 상권도 살아나고 좋잖아요.

 예전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도 골목을 일방통행으로 만들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줄었잖아요.

 맞아요. 그 동네는 비싼 차를 몰고 왔다 갔다 하다, 마주보고 오던 차들끼리 서로 차의 창문을 내리고 ‘네 차 멋진데? 넌 어디 출신이야?’ ‘나? 뉴욕 출신이지’ 하면서 자기 자랑하는 곳인데, 일방통행으로 바뀌니 그런 압구정식의 재미난 소통을 할 수 없게 됐죠.

노천카페에 앉아 그런 외제차 행렬이나 패션 피플을 구경하는 것도 그 동네만의 문화였는데, 노천카페를 불법이라고 못 박아놓았으니 누가 오겠어요.

 동네를 살리려면 그 동네의 문화를 잘 알거나 예술적 감각이 있어야 해요.

 오죽하면 제가 사석에서 농담으로 ‘서울시청 공무원의 30%는 게이를 채용해야 한다’고 했겠어요. 게이는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편견에서 나온 부적절한 농담이었지만, 답답하니까 별소리가 다 나온 거죠.

 ‘이태원 대통령’이라고도 불리는 마당에 주변에서 용산구청장에 출마해보라고 권하지는 않나요?

 하하, 제가 무슨 구청장이에요. 구청에서 동네 상권에 대한 정책을 만든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 돕고는 싶어요.

 그나저나 홍석천씨를 처음 알게 된 건 1996년 시작한 <문화방송>(MBC)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석천씨가 패션 디자이너 쁘와송 역으로 인기를 끌 때였죠. 그동안 방송이나 패션업계에서 활동이 뜸해진 사람들도 많은데, 우리는 지금처럼 살아남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사진 강현욱(스튜디오 어댑터)/한겨레

 1995년 <한국방송>(KBS) 대학개그제에서 동상을 받으면서 연예계에 입문했잖아요. 원래 꿈이 개그맨이었나요?

 아뇨. 언제나 배우가 꿈이었어요. 대학도 연극영화학과였고요. 그런데 계속 탤런트 시험에서 낙방하는 거예요. 졸업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대학개그제에 나갔는데 덜컥 합격해버렸어요. 하지만 그 뒤에도 계속 방송사 탤런트 시험에 도전했죠.(웃음) 

 끈기가 대단하네요.

 고진감래라고, <엠비시>(MBC) 탤런트 시험은 2년 연속 최종에서 떨어지니까 당사 드라마 피디님들이 제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엠비시 시트콤 ‘테마게임’의 단역에 출연하면서 연기의 첫발을 딛게 됐죠. 그러면서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의 출연 기회도 잡게 됐어요.

 고생 끝에, 멋진 배역을 따냈군요. 그때 머리를 밀고 독특한 어조로 말하는 패션 디자이너 쁘와송 역을 맡았잖아요. 튀다 보니 인기를 더 끌었던 것 같아요. 그 대머리는 본인이 선택한 스타일이었나요?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

 당연히 아니죠.(웃음) 그 무렵 한 광고 연출 감독님이 ‘너는 두상이 예쁘니까 머리를 밀어 봐. 밀면 광고에 출연시켜 줄게’라고 권하셨어요. 전문가가 조언해주시는데 어떡해요. 고민 없이 밀었죠. 덕분에 ‘홍석천’이라는 재밌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머리를 민 덕분에 캐스팅은 잘됐지만, 주로 시트콤에서 코믹한 연기를 해왔잖아요. 그래서 대중에게는 석천씨가 진지한 배우보다는 약간 개그맨 같은 이미지가 굳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꿨으니까 그런 점은 조금 아쉬워요. 연극영화학과에서 이경영, 설경구, 유오성, 권해효 선배님과 함께 공부했거든요. ‘나도 저런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설레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런 대배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는지는 몰랐어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당시 국내 대학 연극영화학과에서는 군기 잡는 문화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다녔을 때는 다행히 군기 문화가 없어졌어요. 영화감독 김조광수 선배가 한번은 학교를 뒤집어 놓았거든요. 군기를 없애자고요. 마침 그때 배우 이문식 선배 등 정의로운 분들이 같이 동조해주시면서 학과 분위기가 따뜻하게 바뀌었죠.

대학 졸업 후 시트콤에 주로 출연하며 코믹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섰던 그는 정극 배우의 꿈을 놓지 않았다. 홍씨는 1994년 뮤지컬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시작으로 <코러스 라인>(1999), <가스펠>(2002)과 연극 <풋루스>(2006), <한여름밤의 꿈>(2009), <2010 록키호러쇼>(2010) 등에 출연했다.

 배우들도 연기하기 어렵다는 뮤지컬이나 연극에도 많이 도전했는데, 앞으로 참여하고픈 작품이 더 있나요?

 악역에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지난 겨울에 <절대 그이>(가제)라는 미니시리즈를 촬영했어요. 극중에서 톱스타 배우 역으로 나오는 홍종현씨의 매니저 역을 맡았는데, 보면 재밌을 거예요. 비열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거든요. 4∼5월에 방영할 방송사를 조율하고 있는 중이에요.

“계속되는 도전이 멋있어요. 한국의 대표적인 ‘대머리 연예인’으로서 언제나 스타일리시하고 도전적으로 사는 비결이 뭔가요?”라는 김성일씨의 짓궂은 질문이 이어졌다. “시골촌놈이라 그래요. 부모님이 충정도 청양군 청양읍에 있는 한 시장에서 비단 장사를 하셨죠. 지금의 패션이나 음식 등에 대한 모든 취향을 그때 배운 것 같아요.” 홍씨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나답게 사는 게 가장 스타일리시해질 수 있는 방법이다.” 홍씨가 건넨 패션 팁이다. 그렇다면 가장 ‘홍석천’다운 건 뭘까. 슬쩍 궁금해진다.

“제가 아웃사이더잖아요. 그래도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입을 엽니다. 누구나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그가 다시금 강조한 말이다. 그동안의 발자취대로 앞으로도 ‘홍석천답게 살겠다’는 얘기였다.

*편집자 주 : 해당 인터뷰는 한겨레 기자가 스타일리스트 김성일 씨와 홍석천 씨가 만나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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