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9년 02월 27일 16시 01분 KST

"유전자 검사를 받고 양쪽 유방을 절제한 후에야 검사 결과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COURTESY OF MAUREEN BOESEN
글쓴이 모린 보센이 새로운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기 한 달 전 자신이 BRCA1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걸 자랑스럽게 밝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바즈 루어만이 메리 슈믹의 에세이 ‘선크림을 발라라’(Wear Sunscreen)에 음악을 깔아 만든 영상을 처음 봤을 때가 18세였다.

참조 :‘선크림을 발라라’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 메리 슈믹의 에세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한 이 에세이는 1997년 시카고 트리뷴에 발표되어 이메일 등을 통해 크게 회자한 바 있다. 

당시 그 영상이 뭔가 내 삶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 같이 느꼈지만, 왜 그런지를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했다. 그냥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나중에야 ”당신 인생의 진짜 큰 문제들은 나른한 화요일 오후 4시에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걱정해 본 적도 없는 그런 것들이다”라는 이 에세이의 가사가 나의 현실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나른한 화요일은 2018년 9월 19일에 찾아왔다.

그날로부터 4주 전, 나는 유전학 상당사를 만나 BRCA1 유전자 돌연변이 검사를 받았다. 누구에게나 BRCA 유전자는 있다. 종양을 억제하고 DNA를 고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전자다.

그러나 BRCA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어 종양을 억지하지 못하는 여성은 살면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약 75% 더 높고, 난소암에 걸릴 확률은 약 50% 더 높다. 아주 젊은 나이에 걸리는 경우도 많다.

나는 오래 전부터 BRCA와 유전자 검사에 익숙했다. 사실 나는 검사를 받기 전부터 내가 BRCA1 유전자 돌연변이 양성일 거라 믿어왔다.

우리 가문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전적 유방암 병력 기록을 가지고 있다. 1863년이 최초 기록이다. 어머니는 32세에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다.

가문 내에 유방암과 난소암 병력이 두드러지다보니, 1990년대 초반에 우리 가계가 암과 유전의 관계를 연구하는 대상에 포함됐는데, 이 연구를 통해 BRCA1 유전자 돌연변이가 밝혀졌다.

우리 집안의 가계도엔 통계적으로 가장 유방암과 난소암이 많았기 때문에 유전학계가 BRCA1 돌연변이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우리는 개인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연구 당시 겨우 5살이던 나는 18세가 되어서야 검사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자라면서 BRCA1 유전자 돌연변이에 대해 알게 됐고, 나도 응당 물려받았으려니 생각했다.

대학교 2학년이 된 나는 검사 결과를 보기로 했다. 유전학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는 연구자는 내가 BRCA1 돌연변이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가족력이 있으니 그 결과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검사가 부정확할 수도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확하다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며 나는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한 모든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23세에 두 가슴을 모두 절제한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젊었고, 미혼이었고, 가슴이 없었다. 다행히 수술 후 합병증은 없었다. 나는 BRCA1 유전자 돌연변이가 내 인생을 방해하게 하지 못할 작정이었다. 이후 결혼했고, 아름다운 아이를 셋 낳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 

COURTESY OF MAUREEN BOESEN
1990년 보센과 그의 어머니 수잔 윈. 윈은 이 당시 스테이지 2의 유방암을 치료하기 위해 화학요법을 받던 중이었다.

그러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 유전자 돌연변이는 내 생식계에 여전히 위협을 주었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내 난소가 점점 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내 할머니는 어린 자녀를 6명 둔 채 40대에 난소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궁절제술과 양측난관난소절제술을 받을 준비를 했다. 아이를 더 낳을 계획은 없었고, BRCA1 돌연변이가 있는 여성들이 이 수술을 받기에 적기라고 하는 35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니 브리짓이 2018년 초에 이 힘든 과정을 겪는 것을 보았고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수술은 유방 절제술보다는 덜 복잡하지만, 그 영향은 더 클 수 있었다. 

이 수술을 받으면 두 주요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주요 분비원이 사라져 즉시 폐경에 들어가게 된다.

이 호르몬은 성욕이나 생식 능력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몸의 모든 조직에 영향을 주고, 피부 건강부터 인지, 기억 등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

호르몬 대체가 폐경의 영향을 감소시킬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은 더디고 힘들 수 있다. 큰 수술이고, 아이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고, 많은 여성들에게 있어 여성성을 상징하는 주요 장기들이 사라지게 된다.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일단 유전자 상담사부터 만났다. 보험사에서 수술비를 받아내려면 유전자 돌연변이 양성이라는 검사 결과를 제출해야 했다.

어린 시절 연구 대상으로 받았던 검사의 결과는 찾을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가슴 수술을 받을 때는 검사 결과를 요구받지 않았다.) 유전자 상담사에게 전화를 걸어 검사 일정을 잡았다. 양성이라는 결과가 나오리라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4주 후, 9월 19일 화요일에 들은 소식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전자 상담사는 내게 전화를 걸어 천천히 말했다. “모린, 우리 이야기 좀 해야겠어요.”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음성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 날이 나의 나른한 화요일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습격이었다.

난 당장 차를 몰고 브리짓의 집에 갔다. 언니 집 부엌에 앉아 음성이라서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하며 울었다. 언니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몇 시간이나 그러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

언니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 하지 마. 이건 좋은 소식이야. 우리가 늘 듣길 꿈꿨던 소식이야.” 언니의 말이 맞았지만, 나는 언니가 지금도 짊어지고 살고 있는 운명을 피했다는데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게 내게 이토록 큰 영향을 주었다면 우리 부모님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부모님은 중국에 있었고 한밤중이었지만, 난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내겐 부모님의 응원이 필요했다.

자다 깬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자 어머니는 “뭐라고?”라고 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 탓은 못하겠다. 엄청나게 놀라운 상황이라 좋은 반응이란 게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훨씬 더 현실적으로 반응했다. “왜 안도하지 않아?”라고 물었다. “나는 충격 받았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남편이 옳았다. 나는 신이 났어야 했다. 그런데 왜 그렇지 않았을까?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자의 눈을 바라보며 이 결과가 틀렸을 가능성이 없는지 물었던 2008년 생각이 자꾸 났다. 그는 아니라고 했는데, 그 말은 틀렸다.

내가 BRCA1 돌연변이 음성이라는 건 내가 양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고 압도적이었다. 정말 여러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혼란, 슬픔, 분노, 불안, 우울, 안도.

음성이라는 사실, 삶을 바꿀 수술을 또 한 번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내 삶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정확한 검사 결과로 인해 10년 이상 불필요한 엄청난 짐을 지고 다녔다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잘못된 검사 결과로 인해 두 가슴을 절제하는 큰 결정을 내렸다. 내 아기들에게 젖을 먹일 기회를 빼앗겼다는 게 마음 아팠다.

COURTESY OF MAUREEN BOESEN
유방 절제술을 받은 후 후속 검사를 받기 위해 캔자스 대학교 암센터를 찾은 보센.

 

게다가 나는 암 발병 확률이 높은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오며 그 정체성을 명예의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평생 그 이야기를 하고 다녔고, 이 연구의 일부가 되어 기여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난 누구지? 난 뭐지? 너무나 많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정말 BRCA1 음성이라고? 두 번째 검사가 틀렸을 수도 있는데, 한 번 더 받아야 하나? 네 번째 검사도 필요할까? 첫 검사 결과가 잘못되었나? 내 피가 다른 사람 피와 바뀌었거나, 실수가 있었나?

답이 필요했다.

내 전화에 가장 먼저 응답한 사람은 의료사고 변호사였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고, 내가 겪은 일을 알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는 지극한 연민과 공감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내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네브라스카 주에서 의료사고의 공소시효는 10년이었는데, 내가 결과를 처음 들었던 것은 10년하고 3개월 전이었다. 12주 늦어서 법적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법적 조처를 하지 못하도록 결정 나 있다는 게 고마웠다. 나는 그런 판단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 감정은 너무 거칠었다. 판단력은 흐렸다. 대학에 말해볼까도 했지만 성과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다급해진 나는 의대 학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곧 학교의 위기 관리 부서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들은 내 주장을 살펴보았다고 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 줄여야 할 위험 요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큰 낙심을 느꼈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학교이기까지 해서 더 그랬다. 4개월이나 지나서 내가 기다려왔고 또 두려워한 답이 돌아왔다. 여전히 나는 BRCA1 유전자 돌연변이 음성이었다.

COURTESY OF MAUREEN BOESEN
2017년, 보센과 어머니 윈(왼쪽) 그리고 그녀의 딸 수지(가운데). 

대학이 돈을 댄 추가 검사 결과, 샘플이 뒤바뀐 것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에 그들이 시험했던 DNA는 내 지금의 DNA와 일치했다. 게다가 민간 유전자 검사 연구소 두 곳에서 추가로 검사했으나 새 혈액 샘플에서 돌연변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새 검사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긴 했지만, 여러 의문들이 남았다. 나는 왜 예전에 양성 결과가 나왔는지 지금도 모른다. 대학은 현재 이 사건을 조사 중이며, 이 검사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내 삶에 큰 영향이 있었지만, 예전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유전자 검사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 또한 갖게 되었다.

요즘 세상엔 집에서 검사를 요청하고 불과 몇 주 만에 결과를 받는 일이 흔해졌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는 간단하지 않고 틀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경우 큰 파장이 남을 수 있다.

내가 이 경험에서 배운 것은 스스로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나는 유명한 연구자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나?

내가 그를, 그의 연구나 의학계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만약 그가 틀렸다면?’하는 의심의 목소리가 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검사 결과를 확신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자신을 지키려 했고, 그는 자신이 옳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틀렸다.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자신에게 한 가지만 말해줄 수 있다면, 그가 확신하는 만큼이나 내가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지, 내 머릿속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의사를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신의 직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의사와 테스트는 틀릴 수 있다. 당신의 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신이다. 아쉬움이 남지 않을 때까지 다양한 의견을 찾아보라.

* 모린 보센이 내린 결론은 허프포스트 코리아의 입장과 100%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사건과 사유에 충분한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여 Huffpost US의 기사 ‘I Got A Double Mastectomy After A Genetic Test. Then I Learned The Results Were Wrong’를 번역·편집해 소개합니다.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