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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졸업식

한 사람의 졸업생도 보지 못했다.

서른셋에 죽은 큰언니는 묘가 없다. 왜인지 납골도 하지 않았다. 그날 운구차의 기사가 인적 드문 어느 야산 앞에 차를 세우며 유골을 뿌리고 오라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우리 남매가 우물쭈물하자 기사는 시간이 없다며 짜증을 냈다. 왜인지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시공간의 개념을 상실했던 우리는 무언가에 등을 떠밀리듯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언니를 낯선 언덕의 나무 아래 뿌리고 내려왔다. 살면서 문득문득 떠올랐다. 우리는 왜 너를 그렇게 보냈을까? 너는 어디에 있을까? 그러면 가슴속에 분노 같은 것이 차올랐다.

10년이 지났을 때 나는 언니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뿌린 곳에 함께 가겠느냐 묻자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갈 필요 없다. 은선이는 내 가슴에 묻었으니까.” 평생 비유법 같은 건 쓰지 않던 분이었으므로, 그 말은 꼭 사실처럼 들렸다. 거기라면 영원히 안전할 것 같아서 나는 안도했다. 여전히 언니를 왜 그렇게 보내야 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묻지 못했다.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언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최근에 친구로부터 ‘옛날엔 자식이 죽으면 그 부모 모르게 길에다 뿌려 흩어지게 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의 모든 일이 아버지의 ‘의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시대를 상상했다. 전쟁이 나고 역병이 돌아 집집마다 줄초상을 치르던 시대. 죽은 자식을 붙들고 부모가 넋을 놓으면 줄줄이 딸린 새끼들이 당장 끼니를 굶어야 했을 시대. 이웃들은 그 부모가 빨리 잊도록 도왔을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천하게 처리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죄책감을 털었다.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으시오.” 그리고 부모의 등을 떠밀었겠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음이 문간에서 아귀를 벌린 채 기다리던 시대에 애도는 금지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배운 대로 딸을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날 아침 아무런 준비도 없이 28년을 함께 살았던 언니와 무참히 이별하고 말았다.

어느 고등학교의 졸업식에 갔다. 주인공들을 보기 위해 하객들 사이를 기를 쓰며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강당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졸업생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250개의 빈자리만 있었다. 울고 싶었던 것도 같고 웃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나는 그것을 보려고 아침부터 먼 길을 온 참이었다. 식이 끝난 후 교실로 갔을 때, 그날 처음 만난 한 여성이 오늘 당신의 아들이 졸업을 했으니 짜장면을 사겠다고 했다.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서 가게 된 북경반점에는 한바탕 눈물을 흘린 부모들이 해사해진 얼굴로 삼삼오오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의식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시대를 통과한 사회에서 죽음은 잊히고 치워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4년 4월16일,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기를 거부한 부모들은 ‘산 사람은 살아야지’ 대신 ‘잊지 않겠다’는 구호를 걸었고, 죽음을 존중해서 생명을 지키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도심 한가운데 죽은 이들을 위해 교실을 비워두고 추모공원을 조성할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묻지 못했던 것을 물으면, 그들은 나에게 살아 있는 자식에게 물을 수 없었던 것을 물었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에 대해 학습한다. 왜인지 그것은 모두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여서, 안산에 다녀온 날이면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살고 사랑하고 싶어진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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