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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기를 낳지 말고 '임신 후기 낙태'를 했어야 했다

그게 나에게도, 내 딸에게도 훨씬 자비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 박수진
  • 입력 2019.02.18 12:22
  • 수정 2019.02.18 14:46
2007년 디나 질롯과 딸 조이.
2007년 디나 질롯과 딸 조이. ⓒCOURTESY OF DINA ZIRLOTT

경고: 일부 독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17세 때 성폭행을 당했다. 18세에 아기를 낳았다. 19세 때 아기가 죽었다.

성폭행을 당한 날 아침 하늘이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하기 전 몇 시간 동안 뭘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 전‘과 ‘그 후’만 있다. 나는 그 두 단어 사이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이것이다.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같은 학교의 남자아이에게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의 손이 내 다리를 쓰다듬으며 올라왔다. 그만하라고 하니 그는 “그만하기 싫어”라고만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 이런 긴장 상태가 해제될 것이고 내 집에서 나를 따라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나는 기억한다. 그는 나를 부엌 카운터로 밀어붙였고 나는 헉 하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자기 손으로 입을 막더니 곧이어 내 목을 잡았다. 옷 솔기가 찢어지는 소리, 카운터에 배가 부딪혔을 때의 아픔,  카운터 끝이 내 배에 부딪히던 것, 카운터를 잡은 내 손이 미끄러졌던 것. 시간은 과거로, 미래로 길게 늘어졌다. 나는 저항하며 몸을 빼려 했고, 내 목을 잡은 손은 내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죄여왔다. 내 가슴에서 끔찍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저항을 멈추었다. 내 몸 밖으로 빠져나와 나를 지켜보았다. 내 몸은 저기 숙여진 채로 있고, 그 몸에 일어나는 것들은 나 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가 집에서 나간 건 기억나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부엌의 흰 타일 바닥에서 핏자국을 닦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 마음은 자기인식을 벗어난 단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폭행 당했을 때 입은 옷을 보관해 둔다거나, 어머니를 깨우러 간다거나, 경찰을 부른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방금 일어난 일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침대에 누웠다. 양팔로 몸을 감싸려 했지만, 몸에 손이 닿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내 손이었는데도. 우리 집 수영장에 빠져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바닥으로 가라앉아 위를 쳐다보며 입을 벌리는 걸 상상했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학교 스포츠팀의 치어리더였고 합창단 활동도 했다. 대학 입학 학력고사 성적을 걱정했고, 진로를 두고 수많은 가능성을 시험하고 탐구해 보고 싶어하는 십대였다. 그러나 성폭행이 일어난 후 3개월 만에 내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치어리더는 그만두었다. 아파서 결석하는 날들이 생겼다. 체중이 줄었다.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실제 계획도 짰다.

젖병을 조이의 입에 넣고 턱 아래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밀어올리면 먹일 수 있었다. 한 병을 다 먹는데 2시간이 걸렸다.
젖병을 조이의 입에 넣고 턱 아래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밀어올리면 먹일 수 있었다. 한 병을 다 먹는데 2시간이 걸렸다. ⓒCOURTESY OF DINA ZIRLOTT

성폭행을 당하고 거의 8개월 뒤, 내가 신문지에 싸서 베개 밑에 숨겨둔 성폭행 피해자들의 회복에 대해 쓴 책을 어머니가 발견했다. 어머니는 지난 몇 달 간 내가 보여온 징후들을 되짚어가며 울었고 내게 사과했다. 어머니의 죄책감과 걱정은 나를 둘러싼 두껍고 숨막히는 촉수 같았다. 그때 나는 사랑받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은 오물이었다.

나는 그때 이보다 더 나빠지는 건 불가능하다, 이보다 더 내려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산부인과에 데려가 성병과 임신 진단을 받게 했다. 병은 없었지만, 임신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강간 이후 몇 달 동안 정신적으로 워낙 불안정했던 터라, 내 마음은 몸에서 뜯겨 나간 것 같은 상태였고 내가 내내 겪어왔던 신체 증상에 그것 외에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 몸은 허약했다. 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생리 주기는 원래부터 불규칙했다. 나는 독이었다. 무엇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단 말인가?

간호사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트에 뭔가 표시를 했다. “아버지가 누군지 아니?” 평탄한 목소리였다.

“강간당했어요.” 이렇게 말하자 간호사의 펜이 멈추었다.

어머니는 초음파 검사를 위해 나를 데리고 다시 병원에 갔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마주하기가 너무 두려워 화면을 볼 수가 없었다.

“성별을 알고 싶니?” 직원이 물었다. 그 직원이 내 팔을 두드리며 “딸이야”라고 말한 게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 내가 알고 싶다고 대답했나 보다.

그녀는 곧 조용해졌다. 머리를 스캔하고 측정하는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 배를 닦아주고 어머니와 내게 회의실로 따라오라고 말했다. 내 옆의 어머니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 맞은편의 의자만 바라보았다. 아마 우리 둘 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의사가 와서 초음파 사진을 테이블에 펼치고 뇌 회백질이 있어야 할 곳의 어두운 부분을 가리켰다. 물무뇌증(hydranencephaly)라고 했다. 대뇌 반구 양쪽에서 뇌가 발달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뇌척수액이 가득 차는 선천성 결손이었다. 뇌간은 있기 때문에 태아는 계속 자라긴 했지만, 태어나도 시각과 청각, 인지 능력이 없을 것이며, 발작, 요붕증, 불면증, 저체온증 등에 걸리기 쉬울 것이라 했다. 아이가 겪게 될 괴로운 장애의 목록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살아남기 힘든 증상”이라고, 의사는 재난의 방관자가 쓰는 중립적인 말투로 말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나는 이미 임신 8개월 째였고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짧고 고통스러운 존재. 난 이게 내 잘못이고, 아기에게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고 누가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어느 쪽도 내가 주체성을 갖고 처해진 위치는 아니었다. 당시 내가 살던 앨라배마주에서 낙태는 “임신 후 24~26주 사이 단계까지” 허가되었다. 나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내가 다른 주로 가서 ‘임신 후기 낙태’ 가능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해도, 시간, 서류 작업, 정치, 돈이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었으면 해. 이게 너에게 얼마나 잘못된 일로 느껴질 지 알고 있어.” 의사의 말이었다.

내 마음에 떠오른 단어들은 ‘잔인하다’, ‘비인간적이다’였다. 나는 부서져버릴 것 같은 상태로 실오라기에 매달린 듯 내 삶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많은 것들을 앗아가는 와중에 정상적인 감각을 조금이라도 찾길 간절히 바랐다.

나는 졸업반이 된 지 2주 만에 자퇴했다. 가끔 붐비는 복도에서 강간범을 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그가 있었다. 실제로 없을 때에도 내 눈에 보였다. 어머니와 양아버지는 내게 신고하고 싶은지 물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방에서 그 날 밤의 일을 다시 마주하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했고, 법정에서 낱낱이 파헤치는 걸 견뎌낼 수 없었다. 수치, 우울, 불안, 분노, 내 마음을 뒤덮기 시작한 격렬한 애통함에 짓눌려 나는 제대로 기능하기가 힘들었다.

내 딸은 2005년 10월 27일에 태어났다. 나는 딸을 조이 릴리라고 이름지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만지지 않으려 했다. 만지면 아이가 더 아파할 것 같았다. 내 품에 안긴 채 아이가 죽을까봐, 또 내가 아이를 보고 내 자신을 향해 느끼는 것과 같은 역겨움을 느낄까봐 두려웠다. 병원에서 아이를 데려갔다. 신경학과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조이에게는 젖을 빠는 본능이 없었기 때문에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관을 삽입해야 했다. 신체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뇌간이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조이가 평화롭게 떠나게 하는 게 자상한 선택일 거라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날 병원에 가기 전에 찍은 사진
크리스마스날 병원에 가기 전에 찍은 사진 ⓒCOURTESY OF DINA ZIRLOTT

18살의 내가 산모 병동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던 걸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다시 찾아왔고 성폭행을 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마치 마비된 것 같았다. 젖이 나왔고, 화가 치밀었다. 잔인한 농담 같았다. 당시에는 1년 뒤에 어떻게 될지, 어떻게 내가 이 아기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태어나지 않았길 바랄 수가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조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우리는 아이가 집에서 죽을 걸 알고 있었다. 1년 동안 우리 가족은 조이를 사랑했다.

젖병을 입에 넣고 턱 아래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밀어올리면 먹일 수 있었다. 한 병을 다 먹는데 2시간이 걸렸다. 조이의 몸은 수면 호르몬을 신진대사할 수 없어서, 밤새 자지 못하고 안아주었던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강직성 발작이 일어나면 크고 푸른 눈이 한쪽으로 홱 돌아갔다. 내 옆에 누워있던 조이의 몸이 뻣뻣해지면 나는 조이를 껴안고 조이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조이의 부드러운 냄새를 기억해 두려했다. 가끔은 조이가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잠잠해지기를, 심장이 멎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것을 바라는 동시에 꼭 그만큼 두려워했다.

무더운 앨라배마의 한여름에도 우리는 조이를 전기 담요로 싸두었다. 조이는 체온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해의 큰 명절을 전부 병원에서 보냈다. 추수감사절에는 조이의 입술이 파래졌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신장염 때문이었다. 항생제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조이에게 링겔을 계속해서 꽂는 것을 지켜보았다. 혈관이 하나하나 터져나갔다. 라니티딘, 항이뇨제, 갑상선약, 클로나제팜, 로라제팜, 멜라토닌, 마크로골을 주사했다. 요붕증 진단을 받았다. 우리는 조이의 병실 침대 발치에 붉은 양말을 매달고 심장 모니터 소리를 들었다.

그 와중에 나는 지역의 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일해야 하는 어머니와 교대로 조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느라 수업에 빠질 때도 있었다. 간호 프로그램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 2년 뒤 그 친구는 내 남편이 되었다. 내 삶은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지만, 미약하나마 어느 정도 내 삶에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부활절에 요도 감염, 단백뇨, 통제불능의 열 때문에 다시 병원에 갔다. 소아과의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 이게 마지막일 것 같다고 말했다. 조이가 안정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이자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성폭행 당했던 날과는 달리, 조이가 죽었던 날은 잔혹할 정도로 또렷이 기억난다.

조이는 밤새 발작을 일으켰다.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와 나는 새벽에 응급실로 데려가기로 했다. 병원에 가려 옷을 입었는데 어머니는 내 8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나는 수업을 빼먹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조이는 예진실에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중에 만나면 됐다. 조이의 뺨에 키스했다.

나는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겨 저녁 수업에 갈 수 없게 되었다고 영어 교수에게 메일을 쓰고 있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는 ‘어쩌면 지금인 건가,’ 라고 생각했던 걸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 마음속 어느 끔찍한 부분은 안도했다.

예상하고 있었다 해도, 아이를 잃는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란 불가능하다. 내 제일 친한 친구가 나를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갔다. “우린 병원에 가야 돼. 조이가 방금 죽었어.”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것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누워서 흐느꼈다. 강간당했을 때처럼 나는 내 몸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창틀의 죽은 나방만 노려보았다. 창문으로 햇빛이 내게 쏟아졌다.

조이의 심장이 멎었다. 조이는 나의 양아버지 품에서 죽었다. 나는 죽은 조이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 역시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우리는 조이의 물건들을 전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조이의 잠옷을 손에 들고 엄청난 공허함을 느꼈다. 조이의 작은 발에 딱 한 번만 더 양말을 신기고 싶었다. 손에 입맞추고 싶었다. 우리는 조이가 짧은 평생 절대 벗어날 수 없었던 담요와 함께 매장했다. 나는 조이 옆에 눕고 싶었다. 모든 게 다 끝나길 바랐다. 내가 어떻게 계속 살아가나? 몸 한가운데에 블랙홀이 열려, 내가 완전히 무(無)가 될 때까지 예전에는 좋고 부드러웠던 모든 것들을 다 조각내고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때의 비통함은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이빨도, 턱도 없는 비통함이 지금도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이의 죽음은 지난 12년 동안 몇 번이나 나를 수렁에 빠뜨렸다. 나는 산산조각났다. 내 영혼의 일부는 아직도 흰 타일에 묻은 피를 닦고 있다. 나는 창틀의 죽은 나방이다. 나는 흙 아래 파묻혀있다. 나는 이 단어들 속에 묻혀있다. 나는 무한히 커진다.

이젠 내겐 세 딸이 있고, 가끔은 목이 메어 올 정도로 강렬히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빼앗긴 것들을 비통해 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그같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밀어넣어진 어린 피해자, 어린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런 심각한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지금쯤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하며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그 소녀 역시 자비를 누릴 자격이 있지 않았나? 그 소녀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덜 소중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내가 ‘임신 후기 낙태’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했을까?

그렇다. 단연코 그렇다. 그게 훨씬 자비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조이는 짧은 삶 동안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견디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내 몸 속에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있는 동안에 심장이 멎었을 것이다. 그 이후의 모든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상처를 덜 받았을지도 모른다.

2018년 조이와 남편 랜스, 딸 에인, 아리아드네, 에이셔.
2018년 조이와 남편 랜스, 딸 에인, 아리아드네, 에이셔. ⓒCOURTESY OF DINA ZIRLOTT

여성들이 미투 운동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성폭력 피해자들, 낙태라는 괴로운 선택을 한 여성들에 대한 독설을 읽어보았다. 무지한 정치 때문에 우리의 신체가 계속해서 상품화되고 착취되는 것을 나는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맥락 없는 비판 만큼 비겁한 것은 없다. 그들이 나와 마주앉아 내가 직접 들려주는 내 이야기를 듣길 바란다. 괴로운 세세한 내용까지 전부 듣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내 얼굴을 보며 말해보라. 당신이 내 비극을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해보라. 내가 겪은 일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내 얼굴에 대고 말해보라.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느냐고? 관심을 받고 싶어서라고 생각하겠지? 나도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다. 12년 동안 이 모든 비밀들을 목구멍 아래에 넣고 다니느라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그 긴 시간 내내 소리 없이 굴복하고 피 흘렸던 것, 그건 정말 날 지치게 했다.

내 말은 내 손보다 훨씬 먼 곳까지 갈 수 있다. 왜 내가 계속 그 침묵 속에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나와 내 딸의 사진을 보고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해보라.

내가 당신에게 말할 때는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인간이다. 나는 단순히 아기 낳는 도구가 아니다. 나는 우는 소리조차 내본 적이 없는 내 딸을 대변하고 있다. 부엌 카운터에 밀어붙여진 17세 소녀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지금의 나를 대변하고 있다. 나와 같은 처지에 몰렸거나 처하게 될 과거, 현재, 미래의 나같은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다. 당신이 전혀 다른 것을 주장하고 있고, 그 나름대로 강력한 주장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도 이런 결정이 엄청난 무게를 갖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결정은 우리가 내려야 한다. 이건 우리의 몸,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결정할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태어나지 않을 아이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에 포함된다.

 

*글을 기고한 디나 질롯은 31세 전업주부다. 앨라배마주 모바일에서 남편과 어린 세 딸과 함께 산다. 여가시간에는 케이크를 굽고 장식하지만, 솜씨와 맛은 보장하지 못 한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의 기고 을 번역했습니다.

 

성폭력 피해 관련 상담을 받고 싶다면 아래 기관들에 연락할 수 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전화: 02-338-5801, 평일 10시~17시)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전화 상담 혹은 전화로 직접 상담 예약: 02-335-1858, 평일 10시~17시)
- 한국 여성의 전화 (성폭력: 02-2263-6465, 가정폭력: 02-2263-6464, 이메일 상담: counsel@hotline.or.kr

상담 시간 외에 긴급 상담이 필요한 경우 국번 없이 1366(여성긴급전화), 117(교내 폭력 및 성폭력)로 전화할 수 있다. 장애인과 아동의 경우 지역에 따라 장애인성폭력상담소(검색하려면 클릭), 아동성폭력상담소인 해바라기센터(검색하려면 클릭)가 운영돼 더 전문적인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처음 상담 의뢰한 곳에서 심리 지원, 법적 지원, 의료 지원, 쉼터 연계 등 모든 절차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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