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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15일 11시 52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2월 15일 11시 52분 KST

혐오의 정치학

민주주의의 당연한 요구다.

뉴스1
huffpost

“광주 사람들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들인가?”

80년 5월의 일주일 동안, 광주 민주항쟁은 프랑스 공영 TV의 저녁 8시 뉴스 시간에 연일 톱으로 보도되었다. 국내에서는 언론통제로 아무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세계는 보고 있었다. 화면 중에는 최근 상영된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그 비사가 알려진 독일 제1공영방송(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찍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뉴스를 접한 프랑스인들의 반응 중 하나가 “광주 사람들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들인가?”였다. 그들의 눈에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두 손을 뒤로 묶여 굴비처럼 엮이고, 팬티 바람으로 트럭에 끌려가고, 마구 쏜 총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 시민일 수 없었다. 그보다는 한나 아렌트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로 칭한 ‘파리아’들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소수민족도 이교도도 아닌 광주 사람들에게 진압군이 보인 잔혹성은 혐오감정을 배제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혐오가 정치적 힘을 지속적으로 갖는 이유는 약자와 소수파를 차별, 지배하기 위한 강자, 다수파의 감정기제여서 제어되지 않는데다, 감정이기 때문에 합리성으로 해소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특히 혐오는, 전두환 무리가 그렇듯이, 탄압은 물론 살육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력에게 양심의 짐을 없애준다. 1923년 9월에 발생한 일본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방화한다”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수천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인들의 ‘조선인 혐오 감정’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듯이, 90여년이 지난 오늘 아베 정권을 비롯하여 일본의 극우세력이 이 사실을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에 사죄할 뜻이 없는 것도 ‘혐한(嫌韓) 감정’으로 양심의 짐을 벗어던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경남 합천군에 ‘일해공원’이 있다. 본디 이 공원은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했는데 나중에 일해공원으로 바뀌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꾸로(‘일해공원’에서 ‘새천년 생명의 숲’으로 바뀐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상식의 향방이 그렇기 때문이리라. 공원 입구에는 전두환이 직접 ‘일해공원’이라고 쓴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뒷면에는 “이 공원은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대통령의 아호를 따서 일해공원으로 명명하여 이 표지석을 세웁니다. 2008년 12월31일 합천군수”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3·1독립운동 기념탑’도 이 공원에 세워져 있다는데, “국가권력에 의한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따른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암매장 사건 등이 자행되어 헌정질서를 훼손한 사건”(민변 성명서)의 수괴인 전두환과,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는 공원 사이에 놓여 있는 것 또한 혐오감정이다.

전두환 등을 법으로는 단죄했고,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등의 영화가 호평을 얻었어도 일부 사회구성원에게 혐오감정은 끈질기게 살아 있다. 혐오는 사랑보다 힘이 세다. 가령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전사모)에게도 전두환을 사랑하는 감정보다는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정이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사랑이 우리 눈을 멀게 하듯이, 혐오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민주·반민주 구도를 흐리게 하는 것도 혐오의 힘인데, 그 파장력이 강력한 만큼 다수는 혐오감정을 갖지 않아도 된다. 이 혐오에 분노로 맞서지 않는 ‘착한 방관자’들이 다수로 남아 있기만 하면, 그래서 일해공원을 찾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면 되는 것이다. 혐오의 정치학이 이와 같다.

최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킨 자유한국당 소속 세 국회의원은 스스로 ‘혐오의 정치’의 달인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정치는 혐오의 언어로 혐오감정을 부추기는 것이다. ‘80년 광주폭동’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 등의 발언이 그렇거니와, 세월호 희생자를 두고 “국가를 위해 전쟁터를 싸우다 희생되었는가… ‘시체장사’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따위의 발언이나, “활동 사항 보니 동성애 관련이 많은데, 동성애자는 아니죠?”(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같은 질의도 마찬가지다. 비상식적인 내용, 가짜 뉴스로 선동을 일삼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자유한국당이 재집권하기 어려우리라는 불안감, 초조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혐오의 정치가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를 혐오스럽게 여기게 하여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부수적 효과를 거두어 혐오스러운 정치인들이 정치를 계속 독점하도록 한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혐오는 앞서 말했듯이, 가진 자, 힘센 자, 다수파가 못 가진 자, 약자와 소수파에 대한 차별, 억압, 지배를 관철하기 위한 감정기제로서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인이 유대인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조선인을, 오늘의 이스라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인을 혐오했고 혐오하고 있는데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내국인이 난민,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는데, 그 역이 성립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혐오가 시민성에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에 맞서는 분노를 억압하고 이를 무산시킨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가령 한국의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여혐-남혐으로 대립각을 세워 싸우는 것이 지배세력에겐 실로 아름다운 ‘혐오의 정치학’인 것이다.

혐오의 정치에 휘둘리는 대신 ‘사랑의 정치’에 귀 기울이고 이를 펼칠 때가 되었다. 이것이 촛불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70년 적폐를 쌓은 수구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혐오의 정치를 통해서 관철되었다. 그들의 담론에서 북한과 진보좌파에 대한 혐오,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 점은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식이나 일왕 생일 축하연에는 참석하면서도 남북 철도 연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최근 행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분단체제의 70여년을 지나 새로이 정립되는 남북관계의 전망 앞에서 이 땅에 강고히 뿌리내린 혐오의 정치와 결별해야 한다. 누군가 말한,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을 기본 소명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에 담긴 정치의 본령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혐오감정의 덫에서 차별금지법을 해방시켜 입법해야 할 책무가 촛불정권, 촛불시민들에게 있다. 차별을 금지하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요구다. 유럽 나라들에서는 “21세기는 성소수자의 해방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우리에겐 동성결혼권은커녕 동거권(생활동반자법)조차 없어 성소수자들은 헌법상 권리인 행복추구권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차별금지법에 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비켜갔는데, 집권 후 나온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은 제외되었다.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성소수자 혐오 때문이라는 점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공론장에서 설득도 하지 않고 논쟁도 없이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혐오 옆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의 다른 이름이다.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 정치지도자가 아쉽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