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지난 2017년 자신의 측근들에게 언론인 자말 카쇼기를 살해하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빈 살만 왕세자와 사우디 왕실을 비판해왔던 카쇼기는 지난해 10월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잔혹하게 살해됐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빈 살만 왕세자는 카쇼기가 실제로 살해되기 훨씬 전부터 그를 ‘제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들은 빈 살만 왕세자가 살해를 지시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사우디는 줄곧 이를 부인해왔다.
7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빈 살만 왕세자와 고위급 측근의 대화에 대해 알고 있는 익명의 전현직 미국 및 해외 정부 관계자들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확보했다는 이 대화에는 2017년 9월,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 유력 언론인 투르키 알다킬과 카쇼기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이 담겼다. 알다킬은 최근까지 국영 TV방송사 알아라비야에 몸 담았던 인물이다.
당시는 카쇼기가 미국에 머물면서 사우디 왕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던 시기였다. 그가 워싱턴포스트(WP)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 시점과도 일치한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왕위 계승자로 낙점된 지 몇 달 만에 빈 살만 왕세자가 대대적인 권력 공고화 작업을 준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해 11월의 대규모 숙청이 대표적이다.
지난 12월 초에 작성된 미국 정보기관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알다킬은 카쇼기에게 알아라비야 내 일자리를 줘서 그를 사우디로 귀국시키자고 제안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카쇼기가 스스로 귀국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둘 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총알로(with a bullet)” 카쇼기를 뒤쫓을 것이라고 빈 살만 왕세자는 말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빈 살만 왕세자가 문자 그대로 ‘카쇼기를 총으로 쏘겠다’는 뜻을 밝혔다기보다는 강한 살해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같은 보고서에 의하면, 이 대화가 있기 며칠 전에도 빈 살만 왕세자는 또다른 측근인 선임보좌관 사우드 알-카타니에게도 카쇼기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카쇼기가 글과 트위터로 사우디 왕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는 바람에 자신의 ‘진보적 개혁가’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으며, 한 때 자신의 정책을 지지했던 언론인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카쇼기의 비판이 더 치명적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알-카타니는 카쇼기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경우 국제적인 반발을 부를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사우디는 자국 시민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국제적인 반응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
빈 살만 왕세자가 측근들과 이같은 대화를 주고 받은지 며칠 뒤, 카쇼기의 첫 번째 칼럼이 WP에 게재됐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늘 이렇게 억압적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이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젊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부상해 권력을 잡으면서, 그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으로 만드는 것을 언급했고, 여성 운전 금지처럼 우리의 진보를 발목 잡는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 최근의 체포 바람이다. 왕세자의 왕위 등극을 앞두고 지난주, 약 30명이 당국에 체포됐다. 체포된 이들 중 일부는 나의 절친한 친구들이며, 이같은 시도는 감히 우리나라 권력자들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지성인들과 종교인들에게 공개 모욕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워싱턴포스트 칼럼, 2017년 9월18일)
지난 12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CIA 기밀 보고서를 인용해 빈 살만 왕세자가 카쇼기 살해 작전을 총괄한 측근과 사건 전후로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이 측근이 바로 알-카타니다. 그는 사건 이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만 당시에는 메시지가 오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정보들(발신 시각 등)만 파악됐고 메시지의 내용은 파악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NYT는 미국 정보당국이 빈 살만 왕세자와 알다킬의 대화가 최근에 채록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국가안보국(NSA)을 비롯한 정보기관들은 NSA가 동맹국을 비롯한 해외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통상적인 도청 등을 통해 확보·저장해둔 자료를 끄집어내 빈 살만 왕세자의 음성·문자 통신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고 한다.
7일 사우디 정부는 성명을 내고 NYT의 보도를 일축했다.
”우리는 자말 카쇼기에 대한 극악무도한 살해에 왕세자 측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을 다시 한 번 부인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미 범죄에 연루된 여러 당국자들을 기소했다. 우리는 총체적인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들에게) 완전한 책임을 묻는 데 집중하고 있다.”
NYT는 이제 하원 다수당을 차지한 민주당이 카쇼기 살해 사건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끝내 두둔하면서 사우디가 미국에 약속한 투자 계획 등을 언급한 바 있다.
″우리 정보 기관들은 지금도 모든 정보를 살피고 있지만, 왕세자가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가 직접 구술했다는, 지난 11월에 나온 백악관 성명이다.
허완 에디터 : wan.heo@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