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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07일 15시 24분 KST

1900년대 초반 미국 1세대 한인 이민자가 쓴 소설이 발견됐다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소설가 전낙청의 작품이다

황재문 교수 제공 via 한겨레
재미 한인 작가 전낙청의 소설 ‘구제적 강도’ 첫 장.

미국 이민 1세대 작가가 1930년대 중반에 쓴 한글 소설이 처음 확인되었다.

고전문학자인 황재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7일 재미 한인 전낙청(1875~1953)이 쓴 소설 ‘구제적 강도’(救濟的强盜) 사본(사진)을 <한겨레>에 제공했다. ‘구제적 강도’는 대공황 이후 시기를 배경으로 미주에 사는 한인의 삶을 담은 작품이다.

전낙청은 1904년 하와이 농장 노동자를 거쳐 1907년에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그는 공장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며 자녀와 조카들을 교육시켰으며, 1920~30년대 전후로 여러 소설과 논설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신문·잡지에 발표되거나 단행본으로 출판되지 않고 원고본으로 남아 있다가 지난해 유족들이 남가주대(USC)에 기증하면서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ASSOCIATED PRESS
자료사진: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 LA의 한국계 미국인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된 1세대 이민자들의 사진

전낙청의 원고는 27행의 줄이 그어진 노트에 세로 쓰기로 작성되었다. 띄어쓰기나 문장부호 없이 기록한 원고들은 각각 원고지 2~3천매 분량인 ‘홍경래전’ ‘홍중래전’ ‘부도’와 740매 분량인 ‘구제적 강도’, 그리고 각각 200~300매 분량인 ‘삼각연애묘’ ‘실모지묘’ ‘오월화’ 등 소설 8종, 그리고 논설 몇 편으로 이루어졌다.

소설 가운데 분량이 긴 ‘홍경래전’ ‘홍중래전’ ‘부도’는 <삼국지연의>와 <구운몽> 등에서 볼 수 있는 회장체(回章體) 양식의 고전 역사소설이며, 나머지 작품은 고전소설과 근대소설의 특징이 혼재되어 있지만 소재와 주제, 구성 등에서 근대소설의 면모를 보인다.

특히 ‘구제적 강도’ 원고에는 누군가 ‘대표작’을 뜻하는 라틴어 ‘magnum opus’라는 글씨를 써 놓았는데, 실제로 전낙청의 소설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고 황 교수는 평가했다.

 

[자료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대한제국 여권.(1903년) 영문, 불문,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미국 하와이 방문에 사용되었다.]

 

‘구제적 강도’는 1세대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난 주인공 ‘잭 전’이 에바와 팻시 등 백인 여성들과 벌인 연애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잭과 사귀는 백인 여성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아시아계인 잭과의 교제를 꺼리고 방해하는 모습에서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인종차별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잭은 모함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연인 에바를 위해 은행장을 위협해 돈을 받아내는데, 그 방법이 에바를 구하면서 동시에 실업자들 역시 도울 수 있는 묘책이었다는 점에서 ‘구제적 강도’라는 제목이 나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자료사진: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이 독립운동 및 한인사회 발전을 목표로 운영했던 '합성협회' 와일루아지회 단체사진.(1908년)

전낙청의 원고는 띄어쓰기나 문장부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자는 물론 영어 단어 역시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원문 그대로를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다.

가령 “스답(stop) 업시 다라가 스투릿카(streetcar)을 밧은즉 수투리카(streetcar)는 뎐복(顚覆)되고 그 카(car)은 던복(顚覆)된 카(car) 우에 걸니엇다”와 같은 문장이 띄어쓰기와 괄호 속 한자 및 영어 없이 표기되었다고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겠다.

황재문 교수는 “‘구제적 강도’는 표기 형식과 문장, 소재, 구성 등에서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떠나온 한국의 것과 미국의 것이 뒤섞인 상황 즉 일종의 ‘혼종성’을 보인다”며 “한국 전통 문화와 미국의 문화가 마주쳤을 때 생겨나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구제적 강도’ 연구’라는 논문을 <춘원연구학보> 13호에 발표하면서 이 작품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전낙청의 유족과 원고를 기증받은 남가주대는 ‘구제적 강도’의 국내 출판을 타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