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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그만 두고 산책 중독자가 됐다

오직 저 흉악한 미세먼지가 날 괴롭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홀로
  • 입력 2019.02.05 11:24
ⓒAudtakorn Sutarmjam / EyeEm via Getty Images
ⓒhuffpost

건강을 잃고 직장을 그만둔 지 어느덧 2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내 마지막 직장은 경기 파주출판도시에 있던 한 출판사였다. 그 도시 인근에 자리를 잡았던 나는, 회사를 나온 뒤 굳이 계속 눌러살 필요가 없었음에도 이 고즈넉한 동네의 풍취 속에서 혼자 요양하며 이런저런 일을 궁리했다. 프리랜서의 삶은 과연 놀라울 만큼 힘겹고 괴로운 것이었다. 직장인들이여, “(직장) 밖은 지옥이다”라는 <미생>의 한마디를 가볍게 흘려넘기면 안 된다. 여기선 이렇게만 말해두고 싶다.

어쨌든 지옥철에 시달리며 서울 사대문 안과 테헤란로에서 몇년씩 월급쟁이 생활을 해보았던 내게 파주 문발동과 교하동 일대의 조용하고 느긋한 삶은 굉장히 신선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임이 분명했다. 그 스타일은 나와 찰떡궁합이었고, 다소 정적이고 심심하면서도 미묘한 활기를 머금은 교외의 풍경은 나를 강하게 매혹했다. 나는 몇년 동안 ‘저 멀리 북한이 보이는’ 심학산 일대의 작은 집에 살았는데, 이 집 대문 앞의 농가에서 키우는 닭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자주 새벽잠을 깨곤 했을 정도였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늙은 부부가 함께 밭을 매는 모습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이 2년간의 ‘단독자적인 시골 라이프’가 내게 남겨준 멋진 일상의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산책이다. 산책, 혹은 산보하는 일. 잠깐의 짬을 내서 동네 한 바퀴를 어슬렁거리는 일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개구리와 두꺼비가 울어대는 선선한 밤의 공터를, 개리와 저어새, 큰부리 기러기들이 시원스럽게 우짖는 습지를, 교하신도시 학교에 다니는 발랄한 학생들 사이를, 도서관 뒤편의 산책로와 심학산 둘레길을, 그리고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출판도시의 인쇄소 사잇길을 거의 매일 지나치곤 했다. 가끔은 고라니가 우아하게 뛰어다니는 한밤중의 텅 빈 도시를 걷기도 했다.

걷는 일은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그중에서도 내 가까운 삶의 반경을 잠시 어슬렁어슬렁 거니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이런 어슬렁거림에 중독되었다. 나는 평범하디평범하면서도 별다르게 눈에 띄는 것도 없는 동네 주변을 잠깐씩 넉넉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일에 푹 빠져버렸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한밤이든 꼭두새벽이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홀로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친구들에겐 이러다가 정말로 유령이 될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하곤 했지만,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산책은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고 즐거운 일이었다.

산책에 중독된 이유

나는 왜 산책에 중독되었던가? 돌아보건대, 어쩌면 그 일은 내가 맞닥뜨렸던 삶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회사 생활을 그만둔 뒤 말 그대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홀로의 삶을 살아가며, 집과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몸과 마음을 소소하게 점검하고 반성하는 그 잠깐의 시간을. 즉 나의 생활공간에서 빚어지는 하루하루의 세속적인 삶에 충실하면서, 바로 여기서부터 조금씩 정돈하고 조금씩 나아가겠다는 소박한 의지의 표현을.

내 일상에는 그다지 특별하거나 큼직큼직한 사건들도 없었고, 또 어떤 극적인 스토리도 없었지만, 나는 산책 코스에서 마주쳤던 그 평범한 풍경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 순간들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일상의 흘러들어옴, 그런 작고 부드러운 공백이 내게 선물해준 육체적인, 정신적인, 또 실천적인 의미의 힘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내게 너무도 익숙해진 저 거리의 분위기와 공기의 질감, 자연과 계절의 꿈틀거림이 주는 안정감이 내 살결 위에 묻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그냥 즐겁게 산책함으로써 은연중에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내 삶의 일부가 된 주위의 동네를 하루에 한두 시간씩 걸으며 얻을 수 있던 평화로운 에너지가 있었으니까.

한때는 나도 여권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 일을 사랑했고, 전국 각지의 유적지와 명소를 찾아다니는 일을 즐겼다. 또 어디선가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와 정의를 토론하며, 술에 취한 채 떠들썩한 밤의 향연을 누리는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열심히 산다면’ 언젠가는 이 사회에서 좀 더 뛰어나고 중요한 사람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마도 내가 건강을 잃어버렸던 그즈음부터, 나는 그런 멀리 있는 무언가를 향한 동경과 믿음, 혹은 집착을 놓아버렸다. 마치 영국 작가 줌파 라히리가 소설 <그저 좋은 사람>에서 이렇게 썼던 것처럼. “인생은 어느 시점까지 규모가 불어난다. 그는 이제 그 시점을 넘겼다.”

나는 아마도 하나의 분기점을 맞이했던 것 같다. 줌파 라히리의 묘사처럼, 규모가 불어났던 내 인생에서도 많은 거품이 빠졌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나는 거창하고 진중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벼운,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작고 소박한’ 것들을 더 아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겐 그런 다짐의 상징이 산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단지 산책하는 일을 통하여 “익숙함이란, 무언가를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받아들이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영혼을 환기하기 위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산책은 익숙한 집 주위 동네를 산들산들 걷다가 돌아오는 일일 뿐이니까. 그것은 정말로 거창하지 않고 가벼운 일이니까 말이다. 산책은 무겁지 않다. 가벼우니까 산책이다. 우리가 자연스레 터득하고 있는 것처럼, 산책하는 일은 동그랗고 투명한 공기 방울처럼 텅 비어 있다. 그리고 산책은 바로 그런 가벼움을 통해서 나의 영혼을 잔잔히 환기해주었다.

스위스의 은둔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는 아마도 이 취미에 관한 가장 빼어나고도 서글픈 문학적 성취일 것이다. 발저는 이 책에서 자신이 고요함을 사랑하고, 검약과 절제를 사랑하며, 모든 종류의 소란과 성급함을 정말이지 마음속 깊숙이 혐오한다고 썼다. 또 그는 이 충실한 대지 위에 둘러싸인 감미로운 사랑의 빛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썼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남루한 것, 가장 진지한 것과 가장 유쾌한 것, 산책자에게는 이 모두가 마찬가지로 마음이 끌리며 아름답고 소중”하기 때문에….

발저처럼 살기엔 내 ‘이런, 홀로’의 삶은 이런저런 욕망과 소란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밥벌이는 고되고, 나는 여전히 매사에 조급한 마음으로 쫓기고 있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저녁에도 다시 운동화 끈을 묶고 있으리라. 이미 수천번은 넘게 들었을 좋은 음악을 귀에 꽂고서, 대문을 닫은 뒤 경쾌하게 어딘가를 걷다가 돌아올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오직 저 흉악한 미세먼지가 날 괴롭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글 · 산책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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