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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합격하면 카톡 프로필 바꾸는 부모들

스카이캐슬은 우리 안의 무엇을 비추고 있을까?

드라마 <스카이캐슬>(JTBC)이 1일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스카이캐슬이라는 고급 주택단지 안에 사는 교수·의사 부모들이 자식들을 서울대 의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거액의 사교육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다. ‘스카이캐슬’은 지난 두달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자주 회자된 단어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방영 초기 단순히 흥미로운 드라마로 이야기되던 스카이캐슬은 이후 한국 교육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간주되더니, 이제는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구조와 구성원들의 욕망을 해석해내는 인문학·사회학적 텍스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카이캐슬 신드롬’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사회학)와 손성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초대했다. 김찬호 교수는 <모멸감> <돈의 인문학> <학교와 계급 재생산>(번역)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한 사회학자이며, 손성은 전문의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오랜 기간 아이들을 진료하고 상담해온 소아청소년 심리 전문가다. 두 전문가와의 대담은 지난 27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교육분야를 맡고 있는 양선아 기자의 사회로 진행됐다.

 

 

우리 안의 욕망 절묘하게 드러내

사회 <스카이캐슬>의 인기가 놀랍다. 인기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김찬호 ‘교육 스릴러’라는 표현이 나오더라. 새로운 장르처럼 보인다. 교육을 소재로 한 가족 드라마는 많이 나왔지만, 이 드라마는 단지 입시에만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본다. 출세 경쟁, 고부 갈등, 조직 내 파워게임,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코메디 등 여러 요소들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딱 집어서 절묘하게 표현해낸다.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들을 직설적으로, 때론 독설을 통해 대변해준다. 그런 것들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준다.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판타지적인 면은 분명히 있다. 풀메이크업을 하고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그 판타지가 너무 리얼하다.

손성은 인기 이유는 첫째 ‘그들의 세계’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평소 위화감이나 동경의 대상이었던 의사, 교수와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볼 수 있다.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욕구를 드라마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준다. 둘째, ‘그들도 문제 있고,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면서 위로감이나 동질감을 느낀다. 태생부터 금수저일 것 같은 그들이 알고보니, 한서진(염정아)은 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선지집 딸이었다. 차민혁(김병철)은 세탁소집 아들이었고, 진진희(오나라)는 날라리였다. 자연스럽게 몰입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된다. 어? 이거 내 문제인 것 같은데? 하면서.

사회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한서진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손성은 나는 대치동 학원가에서 14년 동안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해오고 있다. 가족들의 문제를 풀면서 영재, 예서, 예빈이, 연두 같은 사례를 많이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서진 캐릭터가 대치동이나 일반적인 엄마들과 가장 닮았다고 본다. 입시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막 달려간다. 그렇다고 영재네처럼 몰아세우지는 않고, 아이를 칭찬도 해주고 얼르기도 하고 또 나름 속을 끓이며 고민이 많다. 공부가 잘 안되는 예빈이는 미술도 시키고 악기도 해보게 하고, 정 안되면 해외 유학도 고려할 것이다.

 김찬호 서진은 뚝심이 있는 듯 하면서도 종종 흔들렸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전략도 짜지만 좌충우돌하는 모습이었다.

손성은 한서진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강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굉장히 이기적인 캐릭터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데 많은 시청자가 한서진에 공감하는 것은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 조금씩은 다 있다는 것이다.

김찬호 사교육 ‘코디’ 김주영은 한서진과 함께 드라마를 밀고나가는 쌍두마차다. 아이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영혼을 조작하고 최면을 걸면서 목적을 달성하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아이를 망쳤다. 그녀는 죄책감과 자기 혐오에 시달리면서 그 응어리를 세상과 타인에 대한 복수로 분출해왔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에도 그런 어둠이 꿈틀거릴 때가 있지 않은가.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 평온해 보이는 가정에 미친 아내 버사가 숨어 있었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깊숙한 곳에서 파괴적인 집착의 악령이 음산하게 자라날 수 있다.

손성은 김주영이 예서의 마음을 조종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있다.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마왕>이다. 내용은 이렇다.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간다. 그런데 아이가 자꾸 헛소리를 한다. “마왕이 보여요. 마왕의 소리가 들려요.” 그런데 아빠는 아이에게 “(그건 마왕이) 아니다” “잠자코 있어라”라고 말하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도착했을 때 아들은 죽어있다. 이것이 문제 가정에서 많이 관찰되는 모습이다. 아이는 치열한 경쟁, 부모의 과도한 기대 등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문제집 풀기 싫고, 학원 다니기 싫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참아봐. 나중에 얘기하자” 라고. 그런데 도착했을 때 아이는 없을 수 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 현실 속에서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지만 어머니가 자살하는) 영재네나 (성적 스트레스로 자해를 하는) 연두처럼 비극적인 사례가 있나?

 손성은 자식을 자신의 욕망 대리자로 삼거나 아이의 절박한 외침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 흔히 강남, 대치동을 매도하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틱 장애를 겪거나 불안증, 우울증이 심할 때 온다. 그런 증상마저 없으면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 부모 말 잘 듣고 착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5~6학년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중2 정도가 되면 부모와 충돌이 심해진다. 그럴 때 부모가 “너 내 말 안들어?” 하면서 싸우기 시작한다. 아무리 얘기해도 부모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가 어떻게 할까. 몸싸움을 벌이거나 심하면 칼을 들고 자살하겠다고 부모를 위협한다. 가출을 하거나 성적으로 일탈하기도 한다. 최근엔 자해도 많아졌다. 부모랑 육탄전을 벌이는 아이들은 바깥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라면, 자해와 자살은 그 분노가 자기를 향한 것이다. 그것은 “도와주세요”라는 신호다. 그런데 그런 신호를 놓치는 부모들이 많다.

 

 

ⓒHuffpost KR

 

캐슬이 상징하는 것

사회 드라마에서 ‘캐슬’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는가.

김찬호 캐슬은 영어로 `성‘이다. 엄격한 신분제가 유지되던 봉건 시대의 잔재다. 우리나라에서 캐슬과 함께 아파트 이름에 많이 쓰이는 ‘팰리스(왕궁)’도 마찬가지다. 캐슬, 팰리스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의 배타성, 폐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서 선민의식을 갖고 자신을 남들과 구별짓는다. 신분제도는 무너졌는데, 신분 의식은 그대로 남아있다. 서양의 경우, 밑에 있는 신분이 위에 있는 신분에게 도전하고 사회 시스템을 혁파하면서 신분 의식도 함께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동학운동이 그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곧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다. 해방 뒤 고도 성장기에는 경제가 팽창하고 삶의 기회가 확장했기 때문에 남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면 살림이 피고 자신의 부모보다 더 잘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성장의 수축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모멸감을 주는 갑질, 감정 노동이 문제가 된다. 성장의 전망이 안보이고 자기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으니 사람들이 자꾸 옆을 보는 것이다. 사소한 구별짓기에 집착하고,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손성은 캐슬은 모래 위의 성과 같다. 그 사람들은 공고하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내가 아는 어떤 노부부는 평생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부동산도 현금도 많다. 그런데 그동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만든 일도 많아 사람을 무서워한다. 누가 집 앞에 와서 독을 탈까봐 우유 배달도 못시켜 먹는다. 주변을 항상 의심한다.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했지만, 결국 불안하고 외로워진 것이다. 그만큼 돈, 명예, 권력 등으로 쌓은 성은 허망하고 외롭고 불안한 것이다.

김찬호 ‘스카이 캐슬’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유지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일까? 주민들이 모처럼 단합한 것은 이수임이 영재네 집안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나섰을 때다. 그런데 그것은 캐슬의 이미지가 실추된다는 우려로 뭉친 일시적 동맹일 뿐,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 안에서 서로 친한 것 같지만 그들은 언제든 배신을 하고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관계다. 끊임없는 뒷담화가 있고, 협잡과 권모술수, 아첨, 폭로, 누설이 이어진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정투쟁’이다. 한 명 한 명 들여다보면 `나 무시하지 마’ ‘네가 뭔데?’ 같은 말들을 끝없이 외친다. 그것을 보여주는 한 마디가 “우리 애는 레벨이 다르다”이다.

사회 이미 피리미드 상층부에 오른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인정 투쟁을 벌이는 것인가.

손성은 그것만 잘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물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감이 있다면 껍데기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만 아는 것이다. 올라간 뒤의 삶도 드라마에 나오지 않나. 병원장이 복지부 장관이 되려고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줄을 대려 한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고 필요 없는 수술을 하고 실적을 올리려고 한다. 실제 현실 속 의사들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파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기사에도 여러번 나왔듯이 각종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김찬호 있는 그대로 자기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진짜 사랑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손성은 소위 ‘상류층’만 그럴까.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 그런 성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속물 근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사진을 올리고 자랑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자기 머릿 속에 있는 욕망과 이미지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엄마들 프로필 사진이 바뀌는데, 아이가 합격한 학교 사진이나 로고를 올린다. 일종의 ‘온라인 캐슬’을 쌓는 것이다.

 

 

서울 의대라는 상징자본

사회 드라마의 또 하나의 주요 소재는 서울의대다. 서울의대에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

손성은 의사는 3D업종에 가깝다. 잠 못자고 고생하면서 수련까지 마치려면 10년이 걸린다. 피 고름을 묻히면서 수술해야 하고, 부검도 해야 한다. 의료 사고도 당하고, 엄청난 책임감에 시달린다. ‘예서처럼 몇십억 들여서 서울의대 갈 수 있다면 가겠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그 돈으로 건물 사서 서울의대 나온 의사들한테 임대하고 월세 받을래요.” 예서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드라마에서 나온 대로 4살부터 15년 동안 놀지도 못하게 하면서 의사 시킬 필요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아이 잘 키웠어’ ‘성공시켰어’ 하는 부모의 만족감과 욕심을 위해서일 수 있다. 서울의대를 설정한 것은 입시상품 중에 최고 상품이기 때문이다. 진진희도 수완이에게 말한다. “60점짜리가 접시를 깨? 이 접시가 얼마짜린 줄 알아?” 비싼 접시처럼 아이가 애착과 사랑과 과시의 상품이다.

김찬호 경제적 손익을 따져보면 답이 안 나오는데도 매달린다. 옛날에 양반들이 허세에 집착한 것과 비슷한데, 인간 세계에서는 실리보다 명분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이 최고라는 맹목적 믿음이 거기에 깔려 있다. 서울의대는 그런 우월감을 담보하는 일종의 ‘상징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상징자본을 그렇게 중시하는 이유는 뭔가.

김찬호 남은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렇다. 좋은 삶을 구성하는 의미의 자원이 빈곤한 것이다. 자기 나름의 삶을 창조하고 누리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그래서 타인의 욕망에 끌려다니고, 인정 투쟁에 매달린다. 서울대 의대만 합격하면 끝날까.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지 않다. ‘일류대’ 보낸 부모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 사윗감, 며느리감으로 서로 경쟁하고 과시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일류대 의대생이 엄마의 소원대로 의대에 입학해서 같은 대학 경영학과 다니는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 의대보다 레벨이 낮은 학과라는 게 이유였다. 결혼한 다음에는 무엇으로 경쟁할까? 다시 자녀들의 성적과 입시다. 그러다 늙으면 예서 할머니처럼 손주들을 닦달한다. 비좁은 굴레에서 끝없이 맴도는 것이다. 성은 감옥이 된다.

사회 무의미한 경쟁 아닌가.

김찬호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기 삶의 뿌리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실패나 고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뭔가를 방어하고 버티다가 갑자기 딱 무너질 때가 있다. 혜나 표현대로 “사람 빡치게 하는” 그런 상황이 있다. 흔들리는 지점들을 보면, 김주영은 예서 엄마가 와서 “그러니까 네 딸이 그렇게 된 거야”라고 할 때 무너진다. 강준상은 혜나가 자기 딸이라는 걸 알고 무너진다. 강준상 엄마는 준상이 사표낸다고 할 때 무너진다. 예서는 우주가 감옥 간 뒤 면회 가서 흔들린다. 혜나는 예서가 “미혼모의 딸”이라면서 윽박지를 때 무너진다. 노승혜는 남편이 딸에게 “저건 내 딸도 아니야”라고 말할 때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차민혁은 이혼 당할 때 무너진다.

 

 

ⓒHuffpost KR

 

누구나 무너지는 지점이 있다

사회 누구나 그렇게 무너지는 지점들이 있을 것 같다. 결핍이나 트라우마 같은.

김찬호 무너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예서와 그 부모는 궤도 수정을 한다. 크게 깨우치고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인물이 셋인데, 예서 할머니, 차민혁, 김주영이다. 끝까지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믿었던 세계가 무너질 때 그냥 붕괴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다.

손성은 그게 삶이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겸손하게 되고 깊어지고 발전한다. 그게 진짜 ‘레벨 업’이다. 정신 치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드라마는 치유 효과 요소가 많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나 아픔, 트라우마가 있고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너무 아프고 힘드니까 그 부분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주인공들을 따라가면 비밀과 아픔이 공개된다. 출신에 대한 열등감과 거짓말, 가짜 하버드생, 출생의 비밀, 살인 범죄 등에 마음을 졸이던 시청자들이 진실이 밝혀지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진실에 직면하면서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의 그림자를 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된다는 진실도 드라마를 보며 공감할 수 있다. 어릴 적 친구가 비밀을 아는 적으로 등장하지만 다시 친구로 돌아올 수 있고, 나를 떠받들던 사람이 나를 경멸하고 공격하고 머리채까지 잡지만 다시 친해질 수도 있다. 군식구라고 귀찮아했던 아이가 내 딸이라는 상황 설정도 있다. 결국 세상에는 완전한 타인과 완전한 적은 없을 수 있다. 다 돌고돌아 내 식구일 수 있다. 모두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 형제라는 생각으로 우리 의식이 넓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치유적인 집단 무의식이고 영성이다. 꼭 무엇이 돼야 내 딸인 것이 아니고, ‘그냥’ 내 아들이고 딸이면 된다는 것,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도 역시 치유적이다.

사회 결핍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이해할 때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손성은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결핍은 인간의 숙명이다. 결핍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창피함 때문에 도망가고 거짓말을 하고, 결핍을 해소해보려고 더 탐욕스럽게 욕심을 부린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가지도, 회피하지도 말고 그냥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결핍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결핍을 껴안고 품을 수 있고, 결국에는 신기하게도 결핍감이 사라진다.

사회 드라마에서 결핍을 직시하고 껴안는 캐릭터는 누구인가?

김찬호 노승혜가 그런 사례다. 딸이 하버드대에 입학했다는 엄청난 거짓말을 한 사실을 알고 무너졌지만, 딸이랑 함께 옷도 사고 사이가 더 좋아지지 않나. 중요한 전환이다. 딸을 용서하면서 자기도 용서한 것이다. 서로가 용서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다양한 잠재력이 펼쳐지는 그런 장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어마어마한 피라미드만 쌓지 말고.

손성은 차 교수는 “내 딸 아니야. 내 눈 앞에서 치워”라고 말하지만, 노승혜는 “어릴 때부터 떨어져 있었고 내가 소홀한 건 아닐까”라며 딸을 이해해보려 한다. 결핍을 받아들일 만한 힘이 없을 때는 남을 비난하고 등을 돌리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결핍, 모자람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새로운 해결을 시도한다.

 

 

조커, 예빈이의 통찰력

사회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올라가는 두 아이와 드라마를 함께 봤는데, 아이들이 “엄마, 저기 안에서 제 정신인 사람은 예빈이밖에 없어”라고 하더라.

손성은 예빈이는 공부는 조금 못하지만 통찰력이 있다. 상황에 빠져 헤매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눈이 있다. “너 우주 오빠 좋아하지”하면서 언니의 심리도 간파하다. 아빠한테 결정적으로 “아빠가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엄마한테도 “공부는 왜 해? 시험지 훔쳐서 백점 맞으면 되지”라고 말해 엄마 마음을 움직인다. 시청자들도 보면서 “쟤, 똑똑하네”라고 한다. 이런 아이들이 정말 똑똑한 아이들인데, 많은 부모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아이보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자기 것만 잘 챙기는 예서같은 아이를 바란다.

김찬호 예빈이는 언니에 밀려 부모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한다. 그런 아웃사이더여서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본다.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아빠와 엄마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그 배짱으로 자기의 운명도 잘 헤쳐나갈 것이다.

손성은 이제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회복탄력성’과 ‘함께 잘 사는 것’,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모두 삶에서 좌절과 고통을 겪는다. 그런 고통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웃기도 하면서 아이들이 한층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고 생존 욕구를 가진 존재다. 남보다 더 잘나고 싶고 더 갖고 싶은 것은 본능적인 욕구다. 하지만 그것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내 욕구와 욕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계속 줄타기를 하면서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계속 나는 한서진인가, 우주 엄마인가 물어야 한다.

김찬호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은 서울의대 하나를 놓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나눈다. 그렇게 하다보면 놓치는 것이 많아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것을 ‘초점의 오류’(인생의 어느 한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것)라고 한다. 우리 삶 속에는 여러가지 뇌관들이 잠복해있다. 입시만 성공하면 된다고? 착각이다.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아이에게 살아갈 힘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학력보다 더 중요한 자산이나 역량이 많다. 특히 지금은 수축 사회다. 고도 성장기와 다른 시대에 돌입했다. 그런 시대 변화에 맞춰 우리 삶의 방식도 전환해야 한다.

사회 개인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김찬호 잘난 체 안해도 되는 사람들과 만나라. 서로의 학력이 궁금하지 않고, 자녀의 성적을 비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라. 승패나 우열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라. 가족을 넘어선 세대간의 만남도 중요하다. ‘사회적 양육’에 동참하라. 자기 아이만 보고 있으면 계속 비교하게 된다. 집에서는 공부 못한다고 구박받는 아이가 동네 축제를 벌이면서 다른 부모에게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상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

손성은 드라마 주제가인 ‘위 올 라이’의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극중 이수임도 정의의 사자인 것처럼 그려졌지만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못받았다. 이유는 자신의 결핍을 부끄러워하는 친구(한서진)를 이해하지 못한다든가, “너는 나를 못 이겨”라며 여전히 이기고 지는 패러다임 속에 있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속물적인 면도, 정의감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빛과 어두움을 응시하면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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