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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도 사치인 시대

연애는커녕 당장 생존부터가 부담이고 사치다.

ⓒMotortion via Getty Images
ⓒhuffpost

결혼 4년차에 접어들면서 남편과 나는 예전처럼 데이트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는 중이다. 외식을 하기보다는 적당히 해 먹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외식을 하더라도 맨얼굴에 아무 옷이나 대충 걸치고 나와 동네 근처에서 먹는다. 영화는 영화관을 가기보다는 집에서 TV로 본다. 커피는 웬만하면 집에서 원두를 내려 마신다. 편하기도 하지만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모처럼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며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것 같은 기분의 출처를 추적해보았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동네가 아닌 어느 ‘힙’한 시내로 진출하여 근사한 식사와 예쁜 음료에 돈을 지불하는 행위, 거대 자본이 대형 스크린의 영화관과 온갖 상점을 한데 몰아넣은 멀티플렉스를 뭐라도 되는 양 유유히 활보하며 돈을 쓰는 행위. 요컨대 돈을 뜯긴다는 기분이 최대한 들지 않게 하면서 지갑을 털어가는 무수한 공간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행위야말로 데이트를 했다는 느낌의 연원인 셈이었다.

연애에 부담을 느끼는 세대가 20~30대를 넘어 40대로 번지고 있다는 뉴스가 최근 보도된 바 있다. 여기서 연애에 대한 ‘부담’은 물론 연애 ‘비용’에 대한 부담이다. 연애에 드는 비용이 부담이 되는 이유는 우리 시대에 연애를 하는 것이 무언가를 ‘소비’하는 것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소비주의 연애는 약탈적이기까지 하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이를 함께 나누고픈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행위를 볼모로 삼아 안 그래도 얄팍한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니 말이다.

이 시대에 연애란 돈을 털리는 것인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 시대에는 연애마저도 돈을 털어가는가? 월급날이면 월급이 통장에서 로그인했다가 바로 로그아웃한다는 철 지난 유행어가 함의하듯이, 자본은 질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여 소득을 잔뜩 줄여놓고는, 그마저도 자본 자신에 의해 철저히 사유화된 온갖 서비스를 사용한 대가로 죄다 뜯어간다.

김의경의 단편집 <쇼룸>에서는 이러한 긴축재정시대의 연애상을 잘 보여준다. 소설 속 연인들이 연애 감정을 키우는 무대는 다이소와 이케아로 요약된다. 어떤 연인은 다이소에서 만나 다이소에서 헤어진다. 자본에 다 뜯기고 얼마 안 남은 푼돈에서마저도 소비 욕망을 쥐어짜내는 초저가 상품들의 미로 속에 갇히고서야 연애는 간신히 싹을 틔운다. 천원짜리 물건들이 에워싸며 선사하는, 쪼들리지 않는다는 가짜 안도감은 연애에 드는 비용에 대한 부담을 잠시나마 희석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잠깐일 뿐이다. 견고하지 못한 값싼 물건들이 금세 폐기되듯이 그들의 관계 또한 안정되지 못하고 한나절의 소꿉놀이처럼 곧 허물어진다. “침대를 매트리스로, 장롱을 행거로” 대체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삶에 연애는 사치다. “이케아 가구도 자신에겐 사치라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허위로 주어진 연애 가능성의 실체다.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은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탈취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축적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연애의 무대가 소비의 장으로 전락한 우리의 현실 또한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노동에 대한 쥐꼬리만한 대가마저도 자본에 다시 고스란히 갖다 바치도록 촘촘히 설계된 사회를 ‘탈자본화’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연애는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끊임없이 기피되기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연애는커녕 당장 생존부터가 부담이고 사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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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 #연애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