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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정치적 공정함’이 재미를 망쳤다고요?

‘정치적 공정함’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huffpost

세상을 떠난 나의 작은누나는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많은 지망생들이 그렇듯 누나도 습작노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린 나는 이따금 그의 습작노트를 훔쳐 읽곤 했다. 누나의 상상력은 언제나 매혹적이어서 어지간한 TV 드라마나 영화보다 흥미로웠다. 내가 자신의 노트를 훔쳐 읽는다는 사실을 누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짐짓 모르는 척 넘어갔다. 누나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 평을 해줄 독자가 필요했던 거겠지. 어느 날 나는 누나가 쓴 메모 중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고는 잠시나마 누나의 메모가 픽션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기억에 의존해 25년 전 메모를 옮겨 적어본다.

“만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열여섯 소년 월트 디즈니는 1차 세계대전에 의무병으로 참전했다가 파스샹달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는 두 팔을 잃었다. 미국으로 돌아와 캔자스에 자리를 잡은 월트는, 두 팔 대신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혀 형 로이와 동료 어브와 함께 스튜디오를 세우고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를 위해 프로파간다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미국 정·재계에 자신의 영향력을 키웠고, 그를 이용해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참전용사 출신 구족화가들을 자신의 회사에 애니메이터로 채용했다. 나아가 이들과 함께 구족화가들의 권익을 보장하고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협회를 조직하니, 이것이 전미구족화가협회다.”

당당한 장애인 캐릭터는 왜 없나

지금 봤다면 누나의 메모가 대체역사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챘겠지만, 어린 나는 구체적인 연표와 실제 역사적 사실들을 솜씨 좋게 버무린 누나의 메모에 깜빡 속고 말았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런데 왜 난 월트 디즈니 위인전기에서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없지?” 25년이 지난 지금은 누나가 왜 그런 시놉시스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다. 누나는 아마,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며 심지어 야심에 찬 모습의 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작은누나는 일평생 보행장애를 가지고 살았고, 바깥출입이 어려운 탓에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그 덕에 TV를 보는 시간이 다른 이들에 비해 길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가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 만화 중에 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장애인 캐릭터는 기껏해야 비장애인 주인공의 피부양자로 등장해 주인공의 인생을 괴롭게 만들거나(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1994), 세속에 찌든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깨치게 만들어 주는 ‘순수한 면모’의 소유자 정도로 묘사됐다(<레인맨> 1988, <제8요일> 1996). 장애를 지닌 캐릭터가 주인공이 되려면 크리스티 브라운의 일대기를 그린 <나의 왼발>(1989)처럼 주인공이 완전무결한 ‘인간 승리’를 거둬야 하는데, 그 ‘승리’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와의 싸움에서 승리다. ‘심각한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를 극복해낸’ 인물을 보면서, 장애인 관객이 장애를 지닌 자신의 육체를 흔쾌히 긍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을 보며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꿈을 꾼다. <영웅본색>(1986)이 인기를 끌던 시절엔 수많은 남자들이 레인코트를 입고 입에 성냥개비를 물고 다녔고, <슈퍼맨>(1981)을 필두로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엔 골목 가득 보자기를 목에 두른 채 뛰어다니는 소년들이 가득했다. 자신과 비슷한 조건을 지녀 감정이입이 쉬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을 보며, 잠시나마 현실의 고단함을 잊고 허튼 꿈이라도 꿔보는 것, 그런데 그 평범한 일이 장애인들에겐 쉽지가 않다. 장애인 캐릭터가 감정을 이입할 만큼 긍정적인 인물로 나오는 작품도 몇 없지만, 그걸 떠나 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 자체가 워낙 드무니 말이다. 누나가 월트 디즈니가 구족화가로 활동한 평행우주를 상상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제된 캐릭터, 배제된 시청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즐겨 보는 장르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속성의 등장인물이 출현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곤 한다. 2차 세계대전물에 여성 캐릭터가 전사로 등장하는 것이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게임 <배틀필드>), 강인한 육체와 냉철한 상황 판단력을 지닌 캐릭터가 알고 보니 게이라는 설정이 밝혀지자 “남성적인 매력으로 가득한 고독한 늑대 캐릭터에 꼭 게이라는 성향을 덧씌웠어야 했느냐”고 항의한다(게임 <오버워치>). 전통적으로 남성들을 히어로로 내세웠던 스페이스 판타지 장르에 여성 히어로들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자 “정치적 공정성을 추구하느라 기본 설정을 다 무너뜨렸다”고 분노하고(영화 <스타워즈> 프랜차이즈), 뻔한 햄릿, 라이온 킹류 서사에 주인공 집단만 흑인들로 설정한 슈퍼히어로물을 보고는 “흑인 인권을 강조하려다가 재미를 놓쳤다”고 평한다(영화 <블랙팬서>). 한줄로 요약하면 아마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과도한 정치적 공정함 때문에 집중해야 할 재미를 놓쳤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누나를 떠올리곤 한다. 자기 모습을 투영해서 볼 수 있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어서, 스스로 상상해내야만 했던 나의 누나를.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멋진 모험과 근사한 이야기들 속에 자신이 감정이입을 할 만한 자리가 하나도 없다면, 아무래도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관찰 예능을 보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게 사람 아닌가?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고 놀이공원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시청자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빈부격차가 주는 상대적 박탈감도 그런 마당에, 온통 백인 남자들만 나오는 히어로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과 유색인종 관객은 상대적 박탈감을 안 느꼈을까? 이성애자들만 등장하는 대중예술 작품들을 봐야 했던 성소수자 관객들은, 자신들의 존재는 말끔하게 지워진 세계를 반복해서 접해야 했던 장애인 관객들은 어땠을까?

대중예술 속 ‘정치적 공정함’이란 그렇게 거창한 프로파간다도, 대단한 미션도 아닐지 모른다. 부당하게 “내가 배제되었다”는 감정을 느끼는 이가 없도록,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감정이입을 하고 환호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것이 ‘정치적 공정함’의 목표일 것이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인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콘텐츠라면 배역의 절반은 여성의 몫인 것이 자연스럽고, 스무명 중 한명이 장애인인 나라(보건복지부 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 추정치 267만명)에서 만들어지는 대중예술 작품이라면 등장인물 중 장애인 캐릭터가 하나 정도는 나타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내에서 성소수자 인구수를 조사한 적은 없으나, 여러 나라의 조사를 보면 전체 인구 대비 성소수자 인구 비율은 4~7%라고 하니, 그 정도는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고려를 다 지우고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들로만 가득한 세계를 만들어온 관행이야말로, 현실의 통계치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하고 보기 좋은’ 것들만 가지고 환상을 만들려 했던 기득권들의 게으름 아닐까?

최근 한 젊은 코미디언이 자신의 온라인 동영상 채널에 이른바 ‘과도한 PC(정치적 공정함)’를 조롱하는 영상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자면, 아마 ‘자신의 정치적 공정함’을 과시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며 남들을 공격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게 그의 의도였던 듯하다. 그러나 인종차별과 여성 혐오, 성소수자에 대한 보수 기독교 세력의 조직적인 박해, 장애 혐오 등을 극복하자는 목소리가 한국 사회에서 한번이라도 ‘과도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방송에서 자신이 지닌 오랜 콤플렉스와 열패감을 고백했던 그 재능 있는 코미디언이, 자신의 빛나는 재능을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활용해 주었으면 한다. 아마 세상을 떠난 나의 누나도 기뻐할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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