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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봤다

'편견'은 마음을 향해서도 작동한다.

ⓒFatCamera via Getty Images
ⓒhuffpost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바닥을 보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매끈한 털이 큰 동작으로 움직이는 게 내 눈에 힐끗 보였다. “뭐야! 강아지? 지하철 안에 누가 저렇게 큰 개를 데리고 탄 거야?”라며 적잖이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보니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이었다. 사람들이 끼여있어 틈새가 없어 보였지만 안내견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길을 만들었다. 안내견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나도 다시 원래대로 자세를 취하려다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안내견을 바라봤다. 신기했다. 안내견을 자주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내 시선을 재빨리 거뒀다.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구경거리가 된 입장에서는 얼마나 불편한지 경험도 해봤고 익히 들어봐서 알고 있기에 서둘러 내 행동을 다잡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더 극단적으로는 나와 다름을 ‘이상하다’고 여기며 경계하는 태도를 취한다. 신기함에 구경하는 태도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식한 행동이라고 본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지와 편견. 이런 태도들로 인해 서로가 얼마나 상처를 주고받는지 우리는 쉽사리 체감하지 못한다.

신체 외형의 다름, 피부색의 다름, 가족 형태의 다름, 성 정체성의 다름 등. 우리는 그 다름에 대해 다름으로서 존중하지 않고, 이상함으로 여기면서 차별하고 피한다. 겉으로 보이는 외적 요인에 따른 차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음 또한 동일하다. 마음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경계와 적대감을 보이며 차별한다.

마음에 대해 쉽고 빠르게 판단해서 충고하고 지적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상황과 입장은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교만한 행위이다. 우리는 서로 같은 듯하지만 정말 다른 존재이고, 큰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수렴되기도 한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은 위험하다. 이는 조금의 수고로움도 내주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질문하고, 듣고, 헤아려보려는 수고로움 말이다. 상대와 진정한 소통을 하기 원한다면, 그리고 진정한 공감을 해주기를 바란다면 질문을 먼저 해보자.

“지금 마음이 어떤지”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먼저 물어보자.

어떤 것 하나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사람과 관계를 단절하지 말고 몇 번 더 기회를 줘보도록 하자. 처음에 봤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다른 해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기회를 주고 서로를 수용할 수 있는지 조금 더 노력을 해보자. 처음에 옹졸하고 적개심 많아 보이는 태도 뒤에는 상처 받기 쉬운 여린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 처음에 우유부단하고 결정 못 하는 자신감 없음이 이후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깊은 마음으로 표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웃의 글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읽는 데에는 지켜보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너무 와닿는 말이다. 그렇다. 지켜보는 시간과 정성. 그러한 정성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도 기승전결을 모두 읽어야 그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도 기승전결과 희로애락의 시간을 모두 겪어 봐야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관계를 해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된 관계를 맺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꼭 필요한 듯하다.

그러니 상대에 대해 이해와 수용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혼자서 편견을 갖고 판단하지 말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어보자. 그것이 바로 질문을 통한 ‘공감적 이해‘, ‘진정한 공감’으로 가는 길이다.

* 필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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