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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 25일 11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1월 25일 11시 26분 KST

당연하지 않은 결혼과 원치 않는 죽음

결혼의 특권엔 모순이 있다.

fcscafeine via Getty Images
huffpost

요즘 주목해서 읽는 기사가 있다. 장애인 언론지 <비마이너>가 연재 중인 무연고사에 대한 기획 기사다. 시신을 인수해 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의 죽음을 ‘무연고사’라고 한다. 연고자가 없으면 한 사람의 죽음은 애도의 과정 없이 말 그대로 신속하게 ‘처리’된다. 시신은 화장터로 옮겨지고 바로 유골함에 담겨 지정된 장소에 10년간 보관되는 것으로 끝이다.

기사 중엔 연고자가 있는데도 연고자로 인정받지 못해 장례를 못 치른 가슴 아픈 사례도 소개된다. 20년간 함께 지낸 부부였지만 아내가 죽은 뒤 시신을 인수할 수가 없었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 남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아내에겐 일찍 세상을 뜬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자녀가 있었지만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여서 찾지 못해 자연스레 무연고 사망자로 등록되었다. 지금 남편의 유일한 소원은 10년 안에 아내의 유골함을 받아 와서 조용한 곳에 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서류상의 부부만을 인정하는 현행 법률이 바뀌지 않는 한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누가 상상했을까. 아내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사람이 곱게 마무리해주리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당연하리라 믿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당연하게 생각한 건 결혼일 뿐이었다.

함께 생각해볼 다른 사례가 있다. 미국에 20년간 함께 지낸 짐 오버거펠과 존 아서라는 게이 커플이 있었다. 2011년부터 아서는 루게릭병을 앓게 되었고 오버거펠은 극진하게 간호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결혼이라도 하자는 마음이었지만 그들이 사는 오하이오주는 동성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2013년에 두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메릴랜드주로 넘어가 결혼 서약을 맺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3개월 후 아서는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존 아서의 사망신고서에 짐 오버거펠은 배우자로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아서는 독신자로 기록되었다. 아서의 삶이 그렇게 정리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오버거펠은 배우자로 이름을 올리기 위해 오하이오주에 맞서 싸웠다. 이렇게 시작된 투쟁이 2015년에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동성 간의 결혼 역시 모든 미국 국민이 가져야 할 평등한 권리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하는 판결을 낸 것이다.

위의 두 사례가 전해주는 교훈은 혼인 신고의 중요성일까? 아니다. 오히려 명백해진 것은 결혼 제도의 잔인한 허점과 무책임한 독점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헌신적으로 돌보며 약값과 치료비까지 모두 부담하고 있을 때 국가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작 죽음을 애도하려는 순간, 갑자기 자격을 물으며 유일한 기회마저 빼앗아 갔다. 오래전에 기입되었을 낡은 서류 몇장이 근거다. 삶의 무게가 그리 가벼울 리가 없다. 결혼의 특권엔 모순이 있다. 연고자의 일순위는 배우자이기 때문에 만약 배우자가 시신 인수를 포기하면 뒤늦게 자녀들이 나서도 무연고자 처리가 된다. 서류상으론 결혼했으나 평생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아도 국가는 따지지 않다가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 권한을 준다.

국가가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 수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태어난 이들의 삶에도 관심을 갖길 바란다. 국가가 모든 국민을 부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가난한 사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국가가 모든 국민을 이성애자로 만들 필요는 없다. 누구나 평등하고 평화롭게 사랑을 나누며 지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국가가 모든 국민을 결혼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고 또 자유롭다. 누구나 자기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죽음 이후를 상상해보면 우리는 가슴 저릿해지는 진실을 만나게 된다. 부자든 아니든, 잘났든 아니든 나름의 최선으로 살아온 삶의 이력이 있고, 죽음 이후에도 원하는 ‘삶’이 있음을. 나의 죽음이 나의 소중한 이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이 바로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닐까. 결혼은 당연하지 않다. 결혼의 독점을 풀고 내 삶과 죽음까지 나눌, 그런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 필요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