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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무탈한 오늘]

ⓒ21세기북스
ⓒhuffpost

1월 1일이면 상근이에게
올 한 해를 잘 지내자고 인사한다.

상근이는 우리가 이사 오기 전 앞집에 살던 개였다.
누가 산에 묶어 놓고 가버린 녀석을
며칠 만에 동네 주민이 발견해
앞집 아주머니에게 키우라고 데려다준
몸집이 큰 사모예드였다.

ⓒ21세기북스

아주머니는 개를 좋아하는 분이었지만
보살피는 쪽으로는 영 허술해서
상근이는 사람의 잔반을 먹으며 집 없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근이에게 사료를 사주고
때마다 산책을 시키고 철마다 털을 빗기고
아주머니가 준 너무 짠 찌개를 몰래 버리기도 하며 ,
보이지 않는 손으로 녀석을 보살폈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
거센 빗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나는
상근이가 걱정되어 우비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밤에 비가 온다는 소식에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해주긴 했지만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21세기북스

내가 덮어놓은 지붕은 이미 날아갔고
상근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센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녀석을 앞집 비닐하우스 안으로 옮겨놓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준 뒤 집에 가려 했지만,
비닐하우스를 무너뜨릴 것 같은 바람 소리와
벼락 칠 때만 앞이 보이는 시커먼 어둠 속에
녀석을 혼자 두고 가는 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몇 걸음 나서다가 비닐하우스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던 나는
결국 태풍이 잠잠해질 때까지 녀석과 함께 앉아 졸았다.

다음 날부터 그가 상근이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을 다 만든 날,
상근이가 집에서 자는 모습을 보는 일이 너무 흐뭇해
우리는 창문에 붙어 서서 백 번쯤 녀석을 내다보았다.
집이 무겁다는 핑계로 우리 집 앞에서 살게 된 녀석은
다음 해 보리의 아빠가 되었고
술 취해 개집에서 자는 나를 밤새 핥아주기도 하였다.

ⓒ21세기북스

그렇게 2년이 지난 뒤
우리는 서너 달 동네를 떠나 지냈는데
그사이 상근이에게 심장 사상충에 감염된 징후가
급격하게 나타났다.
매일 밥을 주러 가던 그가
녀석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급히 차에 실어 동물 병원에 갔다.

5L에 육박하는 복수를 빼고서야 편해진
녀석의 심장에는 비가역적인 변형이 생겨 있었다.
사상충을 꺼내려면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했지만,
수술 중에 죽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다.
수술을 하든 안 하든 남은 생 내내
심장 약과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는 결과를 받은 뒤
우리는 조심스레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상근이는 이제 많이 아파 계속 돈이 들고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괜찮으시면 저희가 잘 키우겠다고.

그날부터 상근이는 우리 개가 되었다.

어리고 좋은 날 만났지만
우리가 마음껏 돌봐도 되는 울타리에 들어온 건
상근이가 늙고 병들어
남은 시간 보살필 손길이 필요해지고 난 후였다.

진작 그리 못한 게 미안하지만
인연의 시작이 늘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고
후회가 낫게 만드는 상황이란 없기에
우울한 마음을 배제한 채 우리는 담담히 상근이를 지켜본다.

상근이는 하루 두 번씩 약을 먹지만
증상을 경감시켜 주는 것일 뿐
심장의 반쪽은 영영 회복이 불가능하다.
매일매일 배를 만져보며 복수가 찼는지 확인하고,
기침이 잦아지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게, 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때때로 우리는 농담처럼
상근이가 죽으면 포클레인을 불러야 할 거라고,
묻을 자리를 파다가 우리도 죽을 거라며 웃곤 하지만
그런 순간의 농담에는
가슴 한쪽을 누르는 공포감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싶은 절박함이 있다.

1월 1일,
나는 상근이의 양쪽 귀를 꼭 잡고 인사한다.

올 한 해도 잘 넘기자고.
그 뒤는 그다음에 이야기하면 되니까
일단은 올 한 해를 넘기고 보자고.

그렇게 한 해, 또 한 해를 넘겨
녀석의 천수라고 여겨지는 수명만큼
편히 머물다가 큰 고통 없이 떠나기를 바란다.

모든 인연에는 끝이 있고
노력이나 사랑으로 거스를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까지 편하기를 바라는 것,
그 바람이 현실에 구현되도록 움직이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 에세이 ‘무탈한 오늘’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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