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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40년의 역사에서 배운다

여성차별철폐협약이 나온지 40년이 됐다.

ⓒMitch Blunt via Getty Images
ⓒhuffpost

세계 여성인권의 주요 이정표가 세워진 지 올해로 40년이 된다. 인권운동가들이 흔히 ‘시이도’(CEDAW)라 부르는 여성차별철폐협약(협약)이 그것이다. 과거엔 굉장히 불온하게 여겨진 여성의 평등한 지위와 권리가 오늘날 당연한 (적어도 원칙과 형식에 있어) 상식으로 자리잡는 데에는 이 ‘협약’의 공이 컸다.

반세기 전만 해도 국제 인권운동에서 여성인권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주로 개발 분야에서 여성의 주장과 욕구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66년 자유권규약과 사회권규약이 나온 뒤 여성 권리를 독자적인 인권 의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런 움직임에 호응하여 유엔 총회는 1967년 여성차별철폐선언을 내놓는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근본적으로 불의하고, 인간 존엄의 침해다”라는 1조의 천둥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그 여세를 몰아 유엔은 1975년을 국제여성의 해로 정했고, 그때부터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을 준비하여 마침내 1979년 ‘협약’을 제정하였다.

다른 국제인권기준들과 비교해보면 ‘협약’의 특징이 드러난다. 대단히 구체적인 행동 의무를 당사국에 부여한다. 그리고 각국 헌법과 법령에 나오는 여성의 법적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실천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실질적 보장성이 무엇인가.

우선 법이나 정책이 구속력을 가진 효과를 내야 한다. 제도와 인프라의 수준을 높여 여성차별에 관해 공무원, 경찰, 공공부문 종사자를 훈련시켜야 한다. 여성의 출산과 양육의 특성을 사회를 조직하는 모든 단계에서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인권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이런 주장은 지금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엔 혁명공약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협약’이 전세계 여성의 삶과 지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여성의 정치적 권리 신장에 확실히 기여했고, 사회적 권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경제적 권리에 작지만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협약’ 위원회에서 일반권고를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정식 인권 의제로 각인시킨 공로도 평가할 수 있다. ‘협약’에 들어 있지 않은 이슈라 해도 위원회가 하기 나름으로 얼마든지 중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선례를 세웠다.

‘협약’만 따로 떼어 효과를 논하기보다 여러 연관된 요인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 나라가 ‘협약’과 중복되는 내용의 여타 국제조약에도 의무를 지고 있는지, 지속가능발전목표(SDG)와 같은 정책 목표를 잘 지키는지, 정부와 국민이 성평등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협약’을 비준했는지, ‘협약’이 그 나라의 기존 법체계와 잘 호응하는지, 그리고 특히 시민사회 활동이 얼마나 단단히 뿌리를 내렸는지 등의 요인도 중요하다.

물론 ‘협약’에 가입한다고 해서 어떤 나라의 여성인권 수준이 당장 좋아진다고 보긴 어렵다. 정부가 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사이클이 되풀이되면서 정부의 여성 정책이 위원회의 지적과 권고에 서서히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마흔살이 된 ‘협약’이 전세계 여성의 인권을 주류화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189개국이 ‘협약’을 비준한 상태다. 이란, 소말리아, 수단, 통가는 서명을 하지 않았고, 미국과 팔라우는 서명만 하고 비준을 하지 않았다. 한국은 1984년에 비준을 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기 전에 비준한 인권 조약으로 ‘협약’과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있다.

5공 시절인 1982년, 한국 대표단이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뒤 ‘협약’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국제적 신망을 높이려고 ‘협약’의 비준을 추진했지만 국적법의 부계혈통주의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또한 호주제나 동성동본 불혼제 등도 문제가 있었지만, ‘협약’의 일부 조항을 유보한 상태에서 서둘러 비준을 추진했다. 그 뒤 국적법과 가족법을 개정하여 유보 조항을 철회하게 된다.

한국이 ‘협약’을 비준한 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루어진 입법 중 ‘협약’을 반영한 법률이 상당수 있다. 1994년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 1998년의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한 ‘협약’ 위원회의 취지를 이어받았다. 1999년의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과 2004년의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역시 ‘협약’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혁적인 제도가 흔히 그러하듯 ‘협약’도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전통 보수주의는 여성의 개별적 완전성과 독립성, 평등성을 주창하는 ‘협약’을 못마땅해한다. 혼인과 가족관계의 모든 측면에서 평등을 규정한 16조를 유보한 채 협약을 비준한 국가가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급진 페미니즘은 ‘협약’이 젠더평등을 양성평등에 국한시킨 점, 섹슈얼리티에 관한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지 못한 점 등을 비판한다.

‘협약’ 40주년을 맞아 현재 한국 사회를 격동시키고 있는 페미니즘의 도전과 젠더 이슈를 어떻게 보면 좋을까. 첫째, 제도적인 성평등조차 지체된 분야는 근본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 호주제 아래서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그러나 개정된 민법 781조 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강제 부성 원칙에서 부모 협의 원칙으로 개선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혼인신고 할 때 미리 그렇게 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성을 혼인신고 때 미리 정해놓을 신혼부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작년의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이 이런 규정이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현행 민법으로는 결혼 시점에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로 미리 상의한 경우와, 혼인외자만이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다.

이건 거의 블랙코미디 수준의 법이라 할 수밖에 없다. 조경애와 조은경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때 부모가 협의하여 성을 결정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성을 미정으로 둔 채 일단 신고한 뒤 나중에 법원의 결정에 따르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의 성을 국가가 규율하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의 문제 제기가 국제적인 여성인권운동 조류와 연대할 수 있도록 운동가들과 연구자들의 의식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여성인권운동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첨예한 문제의식에 자극받아 시대정신에 민감한 운동으로 진화할 수 있고, 페미니즘은 국제 인권운동이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수준 높은 정책적 도구와 방법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오랜 시간 속에서 누적된 모순의 폭발로서 나타난 페미니즘의 주장과 그것의 표현형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차원과 맥락을 배제한 채 공시적이고 국면적인 분석으로만 접근하면 자칫 인상기적인 비평이나 불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 모든 사회운동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평등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에게 긴 호흡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인간해방이라는 대장정의 일부로서 이 문제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협약’에서 간과되어온 전문의 여러 부분을 재발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 인종차별,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침략, 외국의 점령 및 지배와 국내 문제에 대한 간섭 등의 제거가 남녀 권리의 완전한 향유에 필수적”이라는 지적을 보라. 성평등의 문제가 전세계적이고 국제적인 구조의 모순과도 연결된다는 통찰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미투운동이나 디지털 성범죄 반대 운동이 이런 차원에까지 눈을 돌려 한반도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움직임과도 소통할 때 젠더평등이 더욱 견고한 기반 위에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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