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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 17일 13시 49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1월 17일 13시 49분 KST

선배, 제발 센 척하지 마

그렇게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max-kegfire via Getty Images
huffpost

상투적이지만, ‘피치 못 할 사정’이 마치 누군가 짜놓은 함정처럼 일상을 덮칠 때가 있다. 패션 잡지에서 문화 분야를 담당하는 피처에디터로 있었을 때의 얘기다. 월급이 수줍게 통장을 스치고 지나간 어느 날, 나는 용감하게도 신용카드를 없앴다. 체크카드만으로 한 달을 버텨 보리라, 신용카드의 올가미를 끊고 월급이 쌓이는 부의 선순환을 이룩해 부귀영화를 누리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날 점심에 어쩌다 사무실에 기자가 나밖에 없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12시쯤 되자 패션 팀 후배들이 촬영에 쓴 의상을 들고 하나둘씩 사무실에 모여들었다. “선배 점심 안 드세요?” 그렇게 옆 팀의 후배 4~5명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회사를 옮긴 지 얼마 안 된 나는 그 동네의 물가를 잘 몰랐다. 한국의 거의 모든 패션 잡지는 서울 강남 지역의 신사·청담·압구정동 주변에 모여 있다. 특히 내가 있던 회사는 밥값 비싸기로 악명 높은 도산공원 인근이었다. 별생각 없이 힙스터 느낌 물씬 나는 곳에서 파스타 몇 접시와 차돌박이 라면, 샐러드 두 개를 시켰는데 15만원이 나왔다. 차돌박이 몇 점 넣은 라면이 1만6000원인 메뉴판을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쩐지 쩨쩨해 보일까 봐 일어나지 못했다. 후배들에게 차마 나눠 내자는 말은 못 하고 커피까지 산 후에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다. “카드 재발급을 받으려면 은행에 꼭 가야 하나요?”

이게 다 쩨쩨하지 않으려다 벌어진 사달이다. ‘밥값이나 술값 계산서가 무서운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를 돌리자 여기저기서 성토가 이어졌다. 한 선배는 메뉴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는 ‘시가’라고 말했다. “오늘 우럭이 참 좋은데, 사람 수 맞춰서 한번 드려 볼까?”라고 주인장이 말하면, 긴장부터 한다. “사장님, 시가가 대체 얼만데요? 자연산도 아닌 우럭에 시가가 웬 말인가요?”라고 따져야 옳지만, 후배들 앞에서 어쩐지 쩨쩨해 보일까 봐 묻지를 못한단다. “와인을 시킬 때는 소믈리에가 가끔 밉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어쩌다 큰맘 먹고 레스토랑에 가면 소믈리에가 항상 중상급을 추천한다”며 “근데 또 추천받아놓고 그보다 싼 건 못 시키겠더라”는 게 그 선배의 고백이다. “밥도 사줬는데, 스타벅스에 가면 꼭 6000원이 훌쩍 넘는 ‘프라푸치노’를 ‘그란데’ 사이즈로 주문하는 후배가 있다. 밉기도 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지갑을 꺼내는 대선배들도 마음을 까놓고 물어보면 나름의 마음고생이 있다. 월급쟁이가 뭐 별수 있겠나? 선배가 모든 걸 사는 시대에 후배로 자란 옛날 사람 대부분이 이러고 산다.

모두를 위해 이제는 좀 쩨쩨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대가 달라졌다. 소주보다 비싼 술은 맥주뿐이던 시대, 점심은 한식 아니면 중식이던 시대, 돈가스가 경양식이고 회식은 삼겹살이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동시대 사람들의 취향은 이미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요리에 따라 조합 해가며 마실 만큼 다양해졌고, 외식 가격 역시 대중의 취향에 발맞춰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반면 대다수 기업의 월급은 거북이 걸음처럼 올라가고 있으니, 이제 쩨쩨하게 보이는 게 싫은 마음은 사치다.

선배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데는 후배의 따끔한 한마디가 최고다. 선배한테 최근에 ‘센 척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가 술자리가 더 화기애애해진 일이 있었다. 얼마 전 개인 사업을 시작한 한 선배와 서넛이 함께 만났다가 꽤 거나하게 1차를 마쳤다. 대충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려보니 나라면 “3개월 할부요”라고 얘기할 만큼의 큰 금액이 나올 것 같았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꺼내 드는 아저씨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센 척하지 말고 나눠 냅시다.” 그 선배랑 알고 지낸 세월 동안 그렇게 환하게 웃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그럴래? 요새는 다들 그런다고 하더라.” 테이블 위에 술병과 요리가 늘어갈 때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고 있었을 선배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지면을 빌어 세상의 모든 직장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선배 이제 센 척하지 마, 우리 서로 통장 잔액 불 보듯 뻔하게 알고 있잖아.” 누구나 언젠가는 선배가 될 테니 미리 하는 말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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