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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혼돈의 예고편 : 영국에서 '노딜 브렉시트 리허설'이 실시됐다

하루 평균 1만대 넘는 화물차가 도버를 통해 영국과 EU를 오간다.

  • 허완
  • 입력 2019.01.08 17:40
  • 수정 2019.01.08 17:43
ⓒGareth Fuller - PA Images via Getty Images

유럽 대륙과 영국을 잇는 관문 도버(Dover)에서 ‘노딜(no deal) 브렉시트’에 대비한 리허설이 실시됐다. 통관이 지연되는 상황을 가정해 비상 교통 대책을 점검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이 리허설은 영국이 얼마나 준비가 안 되어있는지, 또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디언파이낸셜타임스(FT) 등 영국 언론들을 보면, 리허설은 7일(현지시각) 이른 아침부터 실시됐다. 내용은 간단했다. 대형 화물트럭들을 도버 항구에서 약 30km 떨어진 임시 주차장에 대기시켰다가 항구로 이동시키는 것.

영국 도버 항구의 화물터미널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화물차들.
영국 도버 항구의 화물터미널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화물차들. ⓒGLYN KIRK via Getty Images

 

임시 주차장이라니?

노딜 브렉시트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보자. 영국과 EU는 브렉시트 이후 양측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할 합의(탈퇴 합의, Withdrawal Agreement)를 체결했다. 흔히 말하는 ‘브렉시트 합의안’이다.

이 합의안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영국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반대하는 의원들이 워낙 많은 탓에 현재로서는 부결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이 아무런 합의 없이 무작정 EU를 떠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노딜 브렉시트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노딜 브렉시트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꼽는다. 왜? 

노딜 브렉시트가 벌어지면 영국과 EU는 3월29일 자정을 넘기는 즉시 덜컥 ‘남남’이 된다.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아무런 합의도 없이 말이다.

이 때 노딜 브렉시트를 가장 먼저 실감하게 될 이들 중 하나는 도버를 거쳐 영국과 유럽을 오가는 화물차 기사들이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국경을 통제해야 한다. EU 회원국일 때는 없었거나 간소하게 치러졌던 각종 통관, 검역 등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GLYN KIRK via Getty Images

 

예를 들어 영국과 EU 세관은 원산지를 엄격히 따져 관세를 부과할 것인지 검토해야 하고, 수출입 신고 서류가 완비됐는지 따져야 한다. 제품이 자신들의 수입 기준에 부합하는지, 발급된 화물차 면허가 유효한지, 운행을 허가할 것인지 등도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화물차들이 국경을 통과하는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다. 영국 화물수송협회(Freight Transport Association; FTA)는 도버 항구나 해저터널 ‘채널터널’을 통과하는 절차가 화물차 한 대당 지금보다 2분씩만 지연되더라도 화물차 대기 행렬이 48km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반대편 프랑스 쪽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에 따르면, 하루 평균 1만대 넘는 화물차가 온갖 물건을 싣고 도버(영국)와 칼레(프랑스)를 오간다. 이곳의 물동량은 영국 전체 상품 무역의 17%를 차지한다. 돈으로 따지면 2017년 한 해 동안 1220억파운드(약 175조원)어치다.

도버 항구나 채널터널에서 비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 ‘오퍼레이션 스택(Operation Stack)’이라는 조치가 준비되어 있긴 하다. 도버로 이어지는 M20 고속도로 구간을 폐쇄해 화물차 대기 공간으로 쓰도록 하는 내용이다. 1988년 도입된 이래 20여차례 시행됐다.

영국 정부는 노딜 브렉시트가 초래할 혼란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오퍼레이션 브록(Operation Brock)’이라는 비상 대책을 추가로 마련했다. 도버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옛 맨스턴 공항 활주로를 화물차 대기 장소로 활용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

 2014년 폐쇄된 맨스턴 공항이 바로 이날 리허설이 실시된 장소다. 

영국 정부는 폐쇄된 맨스턴 공항의 활주로에 최대 6000대의 화물차를 대기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영국 정부는 폐쇄된 맨스턴 공항의 활주로에 최대 6000대의 화물차를 대기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Steve Parsons - PA Images via Getty Images

 

″시간 낭비였다.”

영국 정부는 맨스턴 공항 활주로에 최대 6000대의 화물차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날 리허설이 시작된 오전 8시에 모습을 드러낸 화물차는 89대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가 계획했던 150여대에 크게 못 미치는 숫자다.

리허설에 참여한 화물차들은 네 개 그룹으로 나눠 혼잡 시간인 오전 8시에 이곳을 출발해 구불구불하고 편도 1차선 밖에 안 되는 A256 도로를 타고 도버로 향했다. 그리고는 다시 맨스턴 공항으로 돌아온 다음 11시경 다시 도버로 떠났다. 이 때는 모든 화물차가 나란히 도로를 달렸다.

관계자들은 트럭들이 주요 지점을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을 체크했다. 화물차 행렬이 교통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정부는 리허설에 참여한 화물차 기사들에게 550파운드(약 79만원)씩 지급했다.

″이건 시간 낭비였다.” 리허설에 참여한 화물차 운전기사 아담 카터가 가디언에 말했다. ”(오늘) 이곳 교통량은 평균 수준이었다. 노딜 브렉시트 때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또 맨스턴 공항을 거쳐야 할 경우 ”매주 두 세번씩 40마일(약 64km)”이나 돌아가야 하므로 유류비 등 추가 비용이 화물차 기사들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화물차 기사 데이비드 마틴도 ”솔직히 말해 시간 낭비였다”고 말했다. ”정부가 최소한 뭔가 하긴 했고, (리허설이) 잘 됐지만 우리가 볼 때 대응 시스템을 시험하기에 트럭 80대로는 어림도 없다.”

리허설에 참여한 대형트럭들이 줄지어 맨스턴 공항을 빠져나오는 모습.
리허설에 참여한 대형트럭들이 줄지어 맨스턴 공항을 빠져나오는 모습. ⓒBloomberg via Getty Images

 

이날 리허설을 앞두고 대대적인 홍보가 이뤄진 탓에 교통량은 평소보다 적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실제 있을 법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다. 대형트럭수송협회(Road Haulage Association)에서 정책을 담당하는 로드 맥켄지는 이번 리허설이 ”전시 행정(window dressing)”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켄트와 맨스턴에 6000대를 대기시켜야 할지도 모르는데 고작 89대로는 실제 상황을 결코 재현할 수 없다. 이 비상 계획은 벌써 몇 개월 전에, 되도록이면 더 큰 규모로 실시됐어야 했다.”

정부는 노딜 브렉시트가 벌어질 경우, 화물차 3000대를 M20 고속도로에 대기시키고 이후에 도착하는 4000대는 맨스턴 공항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이다. 대기 화물차가 더 많아지면 도버에서 50마일(약 80km)나 떨어진 M26 고속도로를 대기 장소로 활용한다.

그러나 이번 리허설은 정부와 켄트 지방정부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줬다고 가디언은 평가했다. 화물수송협회의 유럽 정책 담당 폴라인 바스티동은 이번 리허설을 통해 ”노딜 브렉시트를 피하는 게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Bloomberg via Getty Images

 

예고된 재앙

도버 항구의 화물 터미널은 연간 260만대의 화물차를, 인근에 위치한 채널터널은 연간 160만대에 달하는 물동량을 소화한다. 영국 슈퍼마켓에 진열되는 요거트나 과일 같은 유럽산 식료품 뿐만 아니라 의약품과 각종 생필품 등이 도버를 통해 영국으로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영국 내 공장들에게도 도버는 핏줄과도 같은 존재다. 일례로 일본 자동차 업체 혼다는 매일 트럭 350대 분량에 달하는 부품을 유럽으로부터 들여와 영국 스윈든 공장에서 조립한다. 뉴캐슬에 위치한 닛산 공장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업체들이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부품 재고를 거의 확보하지 않는다는 것. 그 유명한 ‘적기 생산(just-in-time)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다는 한 시간 분량의 부품 재고를, 닛산은 반나절 동안 쓸 만큼의 부품만 들여오는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노딜 브렉시트로 인한 통관 지연으로 부품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이 업체들의 생산라인은 멈출 수밖에 없다. 쉽게 변질되는 신선식품은 제 때에 영국 소매점에 도착하지 못한 채 그대로 폐기될 수 있다. 의약품 수급이 지연될 가능성도 진지하게 거론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국 기업들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 중이다. 가디언은 영국 자전거 업체 브롬튼이 브렉시트에 대비해 한 달치 분량 100만파운드(약 14억원)어치의 부품을 재고로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브롬튼의 CEO 윌 버틀러-아담스는 ”창고를 확보하는 데 5만파운드가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품이 모자라면 (생산 지연으로) 며칠 내에 5만파운드의 손실을 볼 수 있다.”

교통부 대변인은 ”노딜 브렉시트 시나리오를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으며 EU와의 합의안을 발효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면서도 ”노딜 브렉시트를 비롯해 모든 가능성과 비상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책임있는 정부의 임무”라고 밝혔다.

”오늘 리허설을 통해 파악된 것들과 추가적인 대책이 주의깊게 검토될 것이다.”

 

허완 에디터 : wan.heo@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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