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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 07일 15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1월 07일 15시 11분 KST

‘고통’을 다룬 책을 읽는 법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쓰며 읽은 책들

 

 

huffpost

이 글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쓰는 과정에서 내가 읽고 참조한 신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는 것이자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가 담긴 책들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담은 것이다. 이 책들이 내가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 때 아는 것이 아니라 좀 아는지 모르는지 좀더 신중한 태도로 다가설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책의 대부분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자전적인 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전시하고 그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 역시 충분히 전시하며 스스로 착취할 수 있지만, 타인의 고통을 다룰 때 아무래도 윤리적 문제가 더 발생할 수 있다. 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반면 자신의 고통은 ‘고백’과 ‘증언’이라는 형태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연필

이런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다. 이 책은 우울에 대한 책으로는 거의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책의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 문학을 비롯해서 의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역사적인 것에서 최신의 과학적 성과까지 최대한의 것을 망라하기 위해 노력한 책이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 솔로몬이 우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세세하고 꼼꼼하게 서술하고 있는지, 그 고통의 과정에서 어떻게 이런 글쓰기가 가능한지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을 겪는 이와 고통의 관계를 고목과 그 나무를 휘감고 오르는 넝쿨식물에 비유한 것은 『한낮의 우울』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세계와 다른 타자는 사라지고 오로지 고통이라는 타자만이 존재하며 그 둘의 위치도 역전되어 고통을 겪는 이가 주체가 아니라 고통이 주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그러나 뼈아프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아픈 몸을 살다』는 사회학자인 저자 아서 프랭크가 심장병과 암을 겪고 난 다음 자신의 경험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닌 질병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책이다. 이 책은 고통을 겪는 이를 의료의 대상으로만 취급했을 때 그가 자신의 언어를 완전히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또한 질병이 결국 그것을 겪는 이의 총체적 삶을 바꾼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지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고통을 겪는 이의 삶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고통의 과정에서 그것이 재건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 점이다. 즉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고통을 겪는 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도와준다. 질환이 그 질환으로 문제가 생긴 신체 ‘부위’를 ‘그것’이라고 부르며 거기에만 집중한다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만 고통을 겪는 이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아서 프랭크는 사회학자답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고통 그 자체는 사람의 주체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고통에 관해 남에게 들릴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사람은 주체성과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당사자들이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빠져나와 정신을 집중하여, 이 책에서 내가 표현한 대로라면 자신의 곁에서 고통을 겪는 스스로를 관찰하며 쓴 책들이 여럿 있다.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분이라면 코믹하기 짝이 없는 『요통 탐험가』를 읽으면서 잠시라도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다룬 책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들

이런 책들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가 넋두리나 한탄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가운데에는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다. 즉 고통의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남에게 나누고 남들이 보탤 수 있는 이야기로 썼다는 것이다. 이 남은 우선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고 주변의 사람이었을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신중하게 골라내 그들이 듣고 보탤 만한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타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 이야기에는 이미 신중함이 있다.

이 저자들이 대부분 ‘지식인’이라는 것 역시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지점이다. 지식인은 그것이 무엇이든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다. 고통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던 언어는 모두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삶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 언어들은 자원이 된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의 언어는 자원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거론한 책의 필자들을 그저 ‘고통을 겪는 이’로 생각하고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이 조금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신중하지 못한 태도라는 뜻이다. 저 사람들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삶이고 직업이었던 사람들이기에 고통의 과정에서도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의지가, 그것를 통해 자신을 존재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게 컸던 사람들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봄날의책

예를 들어보자. 『아픈 몸을 살다』에는 저자가 한밤에 깨어나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그는 고통을 당하고만 있는,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항유하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시’를 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향유한 순간을 역사에 기입하는 것이다. 자신이 다시 고통의 격량으로 빨려들어가더라도 그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음, 그 힘을 가진 주체였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지식인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배운 게 하나도 없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식인보다 더 훌륭한 글을 쓴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제도 교육 안에서 배운 사람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좋은 시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신중함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쓰면서, 고통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대부분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참조했다.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한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의 책들이 대표적이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아메리의 『죄와 속죄의 저편』은 고통에 대해 관성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하고 신중하지 못한 태도인가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여기에 조르조 아감벤의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이 철학적 사유를 좀더 깊게 할 수 있게 도와줬다.

북인더갭

이중에서 프리모 레비의 『고통에 반대하며』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고통에 대한 책이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고통에 관한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가 읽은 책, 그리고 호기심을 느끼며 글을 써보고 싶었던 주제와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사랑했던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도저히 그 무엇도 쓸 수 없는 경험을 했을 때 상실한 것이 무엇이고 어떤 절망을 느끼며 살아갔을지를 조금이나마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다.

레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충실히 따른다. 말과 소리를 구분한다. 글은 소리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말에 속하는 것이다. 말은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렇기에 오해라고 하더라도 이해를 목적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바로 말이다. 이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말은 말이 아니라 사막에서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음이 된다. 이 책에서 레비는 “의미론적 거부”에 불과한 “형언할 수 없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동물 울음소리의 한계에서 울리는 텍스트들을 찬사하는 것에 진저리가 난다”고 하면서 이를 “치밀하게 결합된 협잡꾼”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야말로 어찌 보면 가장 말할 수 없고, 눈물 말고 다른 언어가 없으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사막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그 경험을 결코 쓸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아닌가. 그것이 고독이 아니라 얼마나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사람을 몰아넣는지를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산 사람은 고독하지 않으므로 마치 우리가 고독한 것처럼 써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외로움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글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게 글 쓰는 사람의, 사랑 있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그는 불렀다. 그런 그에게 글이 얼마나 위로가 되며 동시에 배신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글을 쓰며 위로받고 위로받자마자 배신당하지 않는 글이라는 게 어떻게 글일 수 있겠는가.

고통에 대해 글을 쓰는 지식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자기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에 대해 글을 쓰는 지식인의 위치는 무엇이며 그 글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지식인의 신중함에 대해서 말이다.

지식인들은 종종 자신이 쓰는 글이 고통을 겪는 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열망을 표출하곤 한다. 고통을 겪는 이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든, 아니면 사회가 고통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든, 자신의 언어가 고통을 겪는 이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냉정히 말해서 지식인이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고통의 곁에서 연구하며 그 연구가 끝나면 언어를 회수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언어가 고통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자리는 고통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이며 서재이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는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 곁에 서 있는 사람처럼 행세할 때 타격을 받는 것은 바로 곁에 서 있는 사람이다. 이는 고통의 현장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발언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일차적으로 환영할 수밖에 없다. 아직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뿐만이 아니라 언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릴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밀쳐지는 사람이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너넨 내 고통을 모른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리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지식인들이 돌아가고 나면 곁에 있던 이들에게 “그래도 우리에겐 너네가 더 소중하지”라고 말할 것이고, 이것이 고통을 겪는 당사자들의 진심에 가까울 것이다. 곁을 지키던 이들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해해요. 우리한테 의지하니까 저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죠”라고 말하는 것이고 말이다.

현장 연구를 하면서 나는 이런 장면을 숱하게 봐왔다. 그리고 그 지식인들의 글과 말이 고통을 겪는 이는 다루지만 그 곁에 선 이들을 간과하는 것도 많이 봐왔다. 지식인들의 이야기가 학문적인 언어로 정제되진 않았지만 바로 곁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최소한의 존중을 표시하지 않는 것도 숱하게 봐왔다.

곁을 삭제하는 것, 그것이 학문일 수는 있지만 이야기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글과 말은 그가 쓰기 이전에 이미 곁에서 웅성거림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된 것에 대한 존중이 없는 글, 자신이 보태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말인 것처럼 행세하는 글, 그런 글은 보태어진 글이 아니기에 나누어지는 글이 아니라 다른 말과 글을 지배하는 글이다. 그 말과 글 주변에서 다른 말과 글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보태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고 나누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글, 그런 것을 이야기라고 하지 않는다.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는 고통을 겪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자기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그러나 남에게 나눌 이야기이기에 고통을 겪는 이로 하여금 좀더 신중하게 하는 이야기 말이다. 프리모 레비 또한 같은 말을 한다. 울부짖는 것이 필요하지만 아무래도 말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식인들이 곁에 서 있다는 착각에서 물러났으면 좋겠다. 대신 나는 지식인들이 곁에 선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받아서 다음 이야기로 넘기는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싸움이 일어나고 싸우고 있으며 또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어지는 자리는 아무래도 그 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필자의 저서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