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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1월 08일 14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1월 11일 11시 08분 KST

일제강점기 집안 재산 팔아 한국 문화재 지킨 청년

그 돈으로 도자기 20점을 구입했다.

“협상은 결렬됐소.”

  • 자기를 보고 있는 간송 전형필 (Photo by 간송미술문화재단)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우리나라와 일본 골동품 수집 사상 전무후무한 최대 규모의 협상이 있었다. 문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인 간송 전형필이 영국인 존 개스비(John Gadsby) 도자기 컬렉션 20점을 통째로 구입한 일화다.
  • 역 근처에 몰린 군중의 모습. 도쿄. 1920 (Photo by APIC/Getty Images)
    존 개스비는 국제 변호사로 20년간 일본에서 지내며 고려청자를 사랑하던 수집가였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미술을 접했던 덕분인지, 25살에 일본으로 온 뒤부터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발휘해 일본 도자기 수집에 뛰어든다. 이후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고려 청자의 멋에 빠져들어 노선을 틀어 청자에 열성을 쏟게 된다.
  • 개스비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가토에게 애원해서 샀던 바로 그 청자,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 66호) (Photo by 간송미술문화재단)
    우연히 서울에 왔다가 본 도자기에 반해 2년 동안 돈을 모은 후 팔 생각도 없었던 주인을 찾아와 자기를 구입했던 일화도 있다. 
  • 1920년대 도쿄 내 시립 주택 (Photo by APIC/Getty Images)
    그렇게 20년간 22개의 청자를 사 모았다. 사연 없고 애착 안 가는 작품이 없었다. 그러나 국제 정세가 어지럽게 흘러갔고 위기의식을 느꼈던 개스비는 결국 작품을 매각하고 귀국하기로 결심한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은 즉시 일본으로 달려간다. 간송은 오래전부터 개스비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작품을 매각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장기적으로 그의 작품 중개인에게 연락을 해 둔 상태였다.
  • (Eingeschränkte Rechte für bestimmte redaktionelle Kunden in Deutschland. Limited rights for specific editorial clients in Germany.) Korea Seoul Seoul: men conference - 1926- Photographer: Walter Gircke- Published by: 'Zeitbilder' 25/1926Vintage property of ullstein bild (Photo by Gircke/ullstein bild via Getty Images)
    당시 간송을 본 개스비는 놀랐다고 전해진다. 상당한 금액의 고미술품을 구입하겠다고 나타난 이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32살의 젊은 식민지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 1944년 1월 7일 어느 마을의 초가집 풍경 (Photo by Underwood Archives/Getty Images)
    개스비의 탁월한 감식안과 열정 덕분에 그의 컬렉션은 말 그대로 최고였다. 개스비는 55만 원을 제시했다. 경성의 내로라하는 기와집 한 채가 400원이었던 시대였다. 간송은 33만 원 제시했다. 사흘간 협상이 진행됐으나 52만 원과 36만 원에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됐다.
  • 1933년 11월 15일 오래된 판화 인쇄물의 복원 작업을 진행중인 대영박물관 직원의 모습 (Photo by Harry Todd/Fox Photos/Getty Images)
    간송은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개스비는 고국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과 접촉을 했다. 명품을 두고도 몰라봤던 그들의 무관심이 행운이었을까? 한창 서양 회화에 집중하던 대영박물관은 개스비의 제안을 거절한다. 두 번의 협상 결렬 이후 개스비는 다시 한 번 간송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온다. 일본인보다는 자국민에게 작품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간송에게 기회를 먼저 주고 싶어했다.
  •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의 서울 모습.(Photo by: Universal History Archive/UIG via Getty Images)
    일제 강점기에 우리 문화재는 숱하게 해외로 유출되었고, 그 중에서 일본인의 손에 가장 많이 옮겨갔던 것을 그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 개스비의 컬렉션으로 불리는 20개의 작품 중 하나. 원숭이 모자가 서로 안고 있는 애틋한 모습이 귀엽게 표현됐다.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Photo by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은 고민했다. 협상이 무산되면 다시는 그와 같은 상품의 도자기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개스비의 아름다운 컬렉션에 빠져버린 상태였다. 간송은 개스비를 자신의 꿈과 신념이 담긴 장소로 데려간다. 그곳이 바로 현재의  ‘간송 미술관’이다. 설립 당시에는 '빛나는 보물들을 모아둔 집'이라 하여 '보화각'이라 이름지어졌던 그곳. 식민지의 절정이던 당시에도 일본의 눈을 피해 자국의 미술관을 짓고 있던 간송의 의지를 보고 개스비도 한 발 물러서게 된다.
  • 오리의 깃털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photo by 간송미술문화재단)
    '작품은 20개, 금액은 40만원.' 개스비가 제안한 작품 수와 최종 금액이었다. 간송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협상 타결! 개스비가 얼마나 청자를 사랑하고, 어떤 마음으로 경성(당시 서울)까지 왔는지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40만원은 기와집 40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현재 시세로 아파트 한 채를 3억이라고 계산해도 1,200억원 정도.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아는 '거부'였던 그에게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간송은 40만원을 내기 위해 집안 대대로 내려온 충남 공주 일대 땅 1만 마지기를 판다. 결과적으로는 '개스비의 컬렉션'이라고도 불리는 20개의 작품 중 9점은 국보와 보물로 등록된다. 새끼 품은 어미 원숭이를 형상화한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 66호) 등이 그 작품들이다.
  • 상상 속의 동물이었던 기린을 형상화한 12세기 향로,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photo by 간송미술문화재단)
    고려청자를 사랑해 20년간 도자기 22작품을 모은 영국인그의 노력에 후한 값을 주고 작품을 사들인 어린 청년의 영화 같은 일화가 담긴 문화재. 이 모든 작품 중 12작품이 현재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주최한 ‘대한 콜랙숀’ 전시 중 ‘갇스비 컬렉션’이란 코너로 작품이 공개된 것. 이 밖에도 고려 청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 68호)이나 친일파 송병준의 집 아궁이에서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겸재 정선의 화첩인 '해악전신첩' 등도 포함됐다.
  • 1944년 1월 7일, 현대적인 서울의 거리 풍경, 미츠코시 백화점 앞 (Photo by Underwood Archives/Getty Images)
    이번 전시는 문화 수호자이자 교육자로서 자신의 부를 활용했던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사수를 위한 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개스비와의 협상 이야기를 담은 '쫀·갇스비氏 이야기'도 볼 수 있는 기회다. 해방 이후에는 작품 수집을 멈추고 전시와 교육에 전념한 그는, 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현대인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또한 개스비에게 미술관을 보여주며 간송이 했다는 말은 관람객으로서 지금 당장이라도 실천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쁘다. “귀하가 힘들여 수집한 고려청자를 이곳에 전시해 조선에도 이런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간송의 DDP 전시는 이번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 기사는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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