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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흔한 6가지 향신료의 옛날 이야기들: 17세기 조선에는 고추 먹고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고추, 후추, 육두구, 정향, 팔각, 시나몬

  • 박수진
  • 입력 2019.01.04 17:48
  • 수정 2019.01.04 18:09

어린 시절엔 한 번도 본 적 없는 허브와 낯선 향신료의 이름을 통해 먼 나라의 맛을 상상했다. 가루 후추를 주로 먹다가 직접 갈아먹는 통후추를 보고 금보다 값비쌌던 후추의 역사를 떠올리기도 한다. “요 까만 알갱이가 그렇게 귀했단 말이야?” 향신료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봤다.

 

매운맛 대표 선수, 고추

ⓒkolesnikovserg via Getty Images

부트 졸로키아, 도싯 나가, 나가 졸로키아, 하바네로 칠리. 무시무시하게 매운 고추들의 이름이다.

매운맛의 단위인 ‘스코빌 지수’는 1912년 미국의 화학자 윌버 스코빌이 고안한 측정방법에서 유래한다. 고추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을 추출해 매운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설탕물을 섞는데, 그 섞은 비율을 기록해 매운맛 정도를 표기한 것이다.

스코빌은 인간의 혀만큼 정확한 매운맛 측정 도구는 없다고 여겼다. 적어도 새에게는 매운맛 측정을 맡길 수 없다. 대다수 동물과 달리 새들은 고추를 좋아하고, 매운맛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1492년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그곳 사람들이 후추처럼 이용하는 식물 ‘아히’(aji)에 관해 기록했다. 이것이 고추다. 콜럼버스 이후의 항해자들이 고추를 유럽으로, 다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전했다.

고추에 관한 국내 최초의 기록은 1614년에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있다. ‘남만초’ 혹은 ‘왜개자’로 불리던 고추는 주막에서 소주와 함께 팔았는데, 이것을 먹고 목숨을 잃은 자가 적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성종이 찾아 헤맨 후추

ⓒSeksak Kerdkanno / EyeEm via Getty Images

가장 일상적으로 접하는 향신료 중 하나인 후추는 과거 ‘검은 황금’으로 불릴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후추는 설익은 초록색 열매를 따서 잠깐 발효시키고 겉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잘 말려 만든다.

수백 년 전 통후추 알갱이 ‘페퍼 콘’은 임대료와 세금을 지불하는 화폐처럼 쓰이기도 했다. 이 관습이 남아 있는 몇몇 유럽 도시에는 ‘페퍼 콘 임대(집세)’라는 말이 있다.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후추로 집세를 내다가, 19세기 이후 후추의 가격이 떨어졌고, ‘페퍼 콘 집세’는 명목상 임대나 임대료가 매우 낮은 경우를 뜻하는 용어가 됐다.

조선시대 성종도 후추에 관심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후추의 재배다. 성종은 비싼 후추를 우리 땅에서 길러 보급할 생각으로 가공하지 않은 후추 종자를 내내 수소문했다. 하지만 성종이 후추의 맛을 좋아한다고 오인한 주변국들은 후추 선물을 보냈고, 성종은 이를 소비하기 위해 신하들과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후추에 관한 내용이 있다. 조선의 정세를 살피러 온 일본 사신이 연회에서 후추 알을 뿌리자, 악공과 기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후추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를 본 사신이 “너희 나라가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것.

조선 초기까지 후추는 식재료보다 약재로 주로 쓰였다. 조선 후기에는 안동에 살았던 여성 장계향이 기록한 ‘음식디미방’의 95가지 조리법 중 26가지에 후추가 들어갈 정도로 사용이 늘어났다.

 

케첩에도 들어가는 육두구

ⓒfcafotodigital via Getty Images

인도네시아 동부 말루쿠 제도에 속한 반다섬이 원산지인 육두구는 살구 모양의 열매 속 씨를 감싸고 있는 빨간 그물 껍질을 ‘메이스’로, 말린 씨앗을 ‘너트메그’으로 구분한다.

향신료가 사치품으로 거래되던 중세 유럽에서 육두구의 가치를 짐작하게 하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음악·문학·과학·약초학·예언 등 다양한 분야에 육두구는 업적을 남겼으며, 최초의 수녀원을 만든 12세기의 천재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새해 첫날에 넛맥을 선물 받아 주머니에 1년 내내 넣고 다니면 넘어져도 절대 뼈가 부러지지 않는다’며 육두구의 효능을 극찬했다.

현대의 육두구는 고기나 우유, 달걀의 비린내를 제거하고 풍미를 높이는 양념으로 널리 쓰인다. 케첩에도 육두구가 들어간다. 집에서 모처럼 미트볼 요리를 만들었는데 ‘동그랑땡 맛이다’라는 평이 나온다면, 향신료 특히 육두구가 빠졌을 확률이 높다.

한편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미각을 잃게 되는 사건에 육두구 기름이 등장하기도 했다.

육두구에는 환각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미리스티신이 들어있다는데, 요리에 이용해도 괜찮을까? 대량을 한꺼번에 섭취하지 않는 이상, 인체에 해를 미치는 정도는 아니다. 미리스티신은 당근에도 들어있는 물질이다.

 

입 냄새 제거 특효약 정향

ⓒDiana Taliun via Getty Images

꽃봉오리를 따서 진한 갈색이 될 때까지 말리는 향신료인 정향은 육두구와 마찬가지로 말루쿠 제도가 원산지다. 상쾌하고 달콤하면서도 자극적인 향이 특징이다.

정향을 뜻하는 클로브(Clove)는 스페인어 ‘클라보스’(Clavos·못)에서 유래한다. 정향에 함유된 오이제놀에는 소독 작용이 있어 치통이나 잇몸 염증 치료에 사용되기도 했다.

닭의 혀를 닮았다고 해서 ‘계설향’이라고 불린 정향은 중국 한나라 때 관리들이 황제 앞에 나설 때 입에 머금어 냄새를 지우는 용도로도 쓰였다. 중국 삼국시대의 조조가 제갈량에게 계설향 다섯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제갈량이 입 냄새로 고생했기 때문인지, 혹은 그저 선물인지는 미스터리다.


식욕 증진 돕는 팔각

ⓒLujuan Peng / EyeEm via Getty Images

중국요리에 폭넓게 사용되는 팔각은 여덟개 혹은 일곱개의 별 모양이라 눈으로 구분하기 쉬운 향신료에 속한다.

스타아니스(star anise)라고 불리는 팔각에 회향, 정향, 계피, 진피를 배합하면 중국의 혼합 향신료 ‘오향분’이 만들어진다.

2004년 조류인플루엔자,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팔각의 값이 뛰고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팔각에 포함된 시킴산이 인플루엔자 치료제인 타미플루(오셀타미비르인산염)를 만드는 원료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때 팔각을 우려 차로 마시거나 팔각이 들어간 오향장육을 먹으면 신종플루를 예방할 수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국내의 한 쌀국수 체인은 육수의 주원료인 팔각이 신종플루 치료 원료로 쓰인다며 베트남 쌀국수가 감기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킴산은 여러 단계의 화학적 합성과정을 거친 후에야 오셀타미비르인산염이 된다. 가장 널리 알려지고 믿을 만한 팔각의 효능은 ‘식욕 증진’이다.

 

달콤한 향의 대명사 시나몬

ⓒetienne voss via Getty Images

돌돌 말린 막대 형태로,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시나몬의 명칭은 향신료를 뜻하는 그리스 단어와 중국을 뜻하는 접두어에서 유래했다.

시나몬에 얽힌 이야기로 ‘로마 황제 네로가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장례식에서 나라 전체가 사용할 1년치 시나몬을 불에 태웠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어머니 아그리피나에 이어 아내 옥타비아도 살해한 네로의 또 다른 아내가 누구일까? 포파이아는 네로의 두 번째 부인이다. 네로는 임신한 포파이아를 발길질해 사망하게 했다. 값비싼 향신료를 태우는 성대한 의례 뒤편엔 자기 책임을 덜어내고자 하는 폭군의 치졸한 계략이 숨어있다.

시나몬과 비슷한 향기를 가진 계피는 카시아 혹은 카시아 시나몬으로 불린다. 시나몬이 향이 더 부드럽고, 계피에는 톡 쏘는 맛이 있다. 한쪽으로 돌돌 말린 갈색의 식물은 시나몬, 나무 겉껍질이 양쪽으로 말린 것은 계피로 구분한다. 시나몬의 90%는 스리랑카에서 생산된다.

 

참고 도서 <향신료의 지구사>, <페퍼로드>, <향신료의 역사>, <향신료 수첩>, <음식의 별난 역사>, <양념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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