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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1일 17시 06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2월 31일 17시 06분 KST

조 매든 감독의 라인업 카드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내 삶의 2019년 라인업 카드에는 무슨 문구를 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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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스 웨이>(The Cubs Way)라는 책이 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의 야구 전문가 톰 버두치가 2017년 3월 출간한 책으로, 2016년 ‘염소의 저주’를 108년 만에 깨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시카고 컵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테오 엡스타인 사장과 조 매든 감독이 어떻게 컵스를 변모시켰는지와 월드시리즈 1~7차전 안팎의 상황 등이 잘 묘사돼 있다.

책의 맨 앞장에는 매든 감독의 월드시리즈 7차전 라인업 카드가 있다. 1승3패 뒤 5~7차전에서 내리 승리를 거두면서 월드시리즈 왕좌를 차지했으니 의미 있는 카드이기는 하다.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우승 가뭄’을 해갈한 라인업 카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라인업 카드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게 있다.

매든의 라인업 카드는 여타 다른 라인업 카드 모습과는 다르다. 1번부터 9번까지 포지션별 선수 명단 옆에 (세이버) 매트릭스 숫자가 적혀 있다. 삼진율과 그라운드볼(GB:땅볼) 비율 등이 쓰여 있는데 삼진율이 30%를 넘기면 빨간색으로 표기돼 있다. 그라운드볼은 높을수록 짙은 녹색을 띤다. 매트릭스는 상대 투수에 대한 타격 성적이다. 매트릭스는 빨간, 핑크, 연파랑, 파랑 등으로 구분해놨다. 매트릭스는 시즌 타율과 비슷한데 3할 이상이면 괜찮다는 것이고, 2할은 안 좋다는 뜻이다. 라인업 카드만 보고서도 상대 투수에 대한 타자의 능력치를 알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매든 감독은 “난 더 이상 (선수들의) 시즌 타율을 알지 못한다”라고 할 정도로 매트릭스에 대한 신뢰가 있다. 물론 그는 데이터를 맹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흥미를 끄는 것은 카드 안에 적힌 데이터 관련 수치가 아니다. 그가 깨알같이 대문자 약자로만 써놓은 글들이다. “C+B+L”(“Courage plus belief equals life.”: 해석하면 “용기와 신념은 삶과 동등하다.”)이나 “DSB”(“Do Simple Better”: 해석하면 “단순하게 더 잘해라” 혹은 “단순한 게 더 나아”) 같은 글자들이 카드 맨 위에 휘갈겨져 있다.

“DNPTPTETP”. 이것은 “Do not permit the pressure to exceed the pleasure”의 줄임이다. 직역하면 “즐거움을 상쇄하는 압박을 허락하지 마라”일 것이고
“압박에서 벗어나 경기를 즐겨라” 쯤으로 의역할 수 있을 듯하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시카고 컵스 라인업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라인업 사이의 공간에는 “B PRESENT, NOT PERFECT”(‘완벽하게 하려 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라’ 정도 해석 가능)라고 적혀 있고 밑에는 두려움 없이 지도하는 방법을 매든에게 가르쳐준 스승, 돈 짐머의 이니셜이 쓰여 있다.

카드 곳곳에는 이미 고인이 된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이니셜도 있다. 2016년 당시 62살의 메이저리그 베테랑 감독은 월드시리즈 우승 여부가 달린 7차전 전후 내내 라인업 카드에 글을 적으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셈이다.

카드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 “DNBAFF”. 과연 무슨 뜻일까.

“Do not be a fucking fan.”

직역하면 “팬처럼 굴지 마” 쯤 될 것이다. 왜 매든 감독은 이런 문구를 라인업 카드에 적어 놨을까. 짐작한 그대로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경기를 하나하나 풀어가라는 뜻이다. 때문에 “DNBAFF”라는 글귀 밑에는 곧바로 “PROCESS”라는 말이 강조돼 있다. “과정에 충실하고 미리 결과를 의식하지 마라”(Stick to the process; don’t worry about results)의 의미라고 책에는 적혀 있다.

DNBAFF. 이 말만큼 핵심을 콕 찌르는 말이 있을까. 매든 감독은 이 문구를 월드시리즈뿐만 아니라 모든 라인업 카드에 적어놓았다고 한다. 감독은 ‘팬’의 입장에서 경기를 운영해서는 절대 안 되니까.

컵스의 108년 한을 풀 주문과도 같던 매든 감독의 월드시리즈 7차전 라인업 카드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내 삶의 2019년 라인업 카드에는 무슨 문구를 써볼까. “B PRESENT, NOT PERFECT”도 꽤 괜찮은 선택이 될 듯하다.

* 필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