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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로맨틱 코미디는 여러 가능성을 탐구해 왔다.

ⓒILLUSTRATION: HUFFPOST; PHOTOS: ALAMY/NETFLIX

2018년 8월에 피터 카빈스키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제리 한의 동명 영 어덜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의 로맨틱 코미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소리소문없이 인터넷에 등장했고, 미국의 여성 성향 영화(chick-flick) 팬들의 마음은 모두 폭발했다. 주인공 라라 진 코비는 쿠키를 굽고 친구가 거의 없는 여학생이다. 주인공에게 반하는, 라크로스를 하는 남성 주인공이 처음 인기를 끌었던 큰 요인이었다.

피터 카빈스키(노아 센티네오)는 자신감 있고, 말도 안될 정도로 미남이고, 매력적이고,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잘 돌봐준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감정에도 열려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완벽한 남자친구다. ‘그녀를 위한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현실적이지도, 가짜 같은 이상형도 아니다. 파트너에게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믿을 만한 정도로 다 갖추고 있다. 화면 속의 그를 보며 나는 라라 진(라나 콘도르)을 깨지기 쉬운 유리잔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감을 갖도록 자연스럽게 도와주는 그의 능력에 몇 번이나 눈물이 났다.

갑자기 나타난 피터 카빈스키의 존재는 이성애자 여성들이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여린 부분을 찔렀다. 이런 종류의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 로맨틱 코미디에 있었나? 적어도 내가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상징하는 판타지는 이성애자 여성을 상대로 한 로맨틱 코미디의 기반으로 느껴져서, 왜 이제까지 이런 캐릭터가 없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여성들이 적어도 이상적인 남성 파트너를 꿈꿀 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 현실 세계에서처럼 픽션 세계에서도 부족한 것에 만족할 필요는 없어야 한다는 것. 이 캐릭터는 로맨틱 코미디 시청자들에게 이제까지는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그동안 위트있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성과 짝을 이루는 것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지난 수십 년간의 로맨틱 코미디의 남성 주인공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에 내가 기꺼이 속아왔던 것 같은 기분이다. 두 캐릭터 간의 로맨틱한 결합이 내러티브의 중심을 이루는 가볍거나 코믹한 영화라고 로맨틱 코미디를 폭넓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사랑해왔던 로맨틱 코미디들조차, (다행히 가상의 존재인) 여성이 자신의 행복을 사기꾼, 약탈자, 흔해빠진 개자식들에게 맡기는 것을 응원하도록 우리를 꼬드겼다. 위대한 노라 에프론은 로맨틱 코미디의 한 시대를 정의했지만, 평균적인 뉴욕 상위 중산층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남성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언제나 냉소를 드러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20년 전에 개봉한 에프론의 ‘유브 갓 메일’의 주인공 조 폭스(톰 행크스)가 지금처럼 형편없는 연애 상대로 보인 적은 없었다. 폭스는 돈이 많고, 캐슬린 켈리(멕 라이언)가 감기에 걸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꽃인 데이지 꽃다발을 가져다 주긴 했다. 신랄한 농담이 가끔 재밌긴 하다. (이 정도까지는 에프론에 감사할 수 있다.) 행크스는 체격이 좋고 섹시하지는 않지만, 캐슬린의 사업을 난도질하는 그를 보면서 눈이 아플 정도의 외모는 아니다. 1998년에는 그 정도면 성공이었던 것 같다.

로맨스에 가장 굶주렸을 때조차 나는 조 폭스를 갈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폭스만이 아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패트릭 베로나에겐 분명 우락부락한 섹스 어필이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몇백 달러를 벌겠다고 한 여성을 감정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좀 별로다. (라라 진 코비의 경우와는 달리, 패트릭의 타깃은 자신의 연애가 가짜라는 걸 몰랐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콜린 퍼스가 연기한 마크 다시는 완벽함에 가깝지만, 굳이 트집을 잡아보자면 그는 너무 뻣뻣하고, 브리짓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대화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브리짓이 열등하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라라 진처럼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영화에서 겨우 한두 가지의 매력만을 가진 남성들을 보며 만족해왔다. 그냥 섹시하거나(‘아직은 사랑을 몰라요’의 제이크 라이언), 재미있고 좋은 친구거나(‘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해리) 그 사이 어딘가의 어정쩡한 남성들이었다. 용납할 수 있을 정도의 남성들을 굉장히 매력적인 남성이라고 우리에게 보여줘왔고, 얼굴이 좌우대칭이고 자기 성기 생각에 정신을 팔지 않고 10분 이상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남성은 판타지라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사실 상당히 많다.

미국 로맨틱 코미디 시청자들은 이제까지 더 큰 꿈을 품을 수 있다, 모든 것(외모, 성격, 자신감, 따뜻함)을 가진 한 파트너를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을 거의 접하지 못했다. 아니,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피터 카빈스키가 등장하고 나자, 많은 여성들은 그동안 우리가 받았던, 이정도면 대단한 거니 이걸 보고 만족하라던 작은 부스러기들에 반발하고 있다.

이성애자 여성에게 있어 결혼 또는 연애란 감동적이지만 끝없이 우울한 주제다. 남성은 파트너란 자신에게 필요하다기보다는 원하는 대상인 위치에 언제나 있어왔다. 아내는 무급 혹은 적은 돈만으로 살림을 하고, 직접 만든 요리를 주고, 아이를 낳아준다. 여성은 보통 정반대의 위치다. 여성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을 수 있으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편이 필요했다. 꼭 필요한 것(경제적 안정) 뿐 아니라 매력(외모, 좋은 성격, 친절함, 강렬한 끌림)도 가진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제인 오스틴 소설 등에 나오는 결혼 이야기의 궁극적 목표였다.

여성들의 경제적 해방이 점점 이루어지면서,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 로맨틱 코미디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 있다. 최근의 역사에서 결혼이 여성에게 준 분명한 장점 단 한 가지는 여전히 경제적인 것이었다. 결혼이 여성을 더 행복하게, 건강하게,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여성은 심각한 가정내 학대를 당하거나 이성 파트너에게 살해 당할 확률이 남성보다 높다. 여성이 결혼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는 있지만, 제인 오스틴 시절처럼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전통적인 로맨틱 코미디는 한동안은 한물간 것 같았다. 어린아이 같은 요즘 성인 남성들의 연애에 대한 불안을 다룬 주드 아패토우 감독의 브로맨틱 코미디가 더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2018년에 내놓은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키싱 부스’ 등 여성을 겨냥한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나오자 팬들은 다시 몰려들었다. 페미니즘, 경제적 자립 가능성 증가로 그들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과장해서 말해선 안된다.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지금도 하는 일에 비해 적은 돈을 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또래 남성에 비해 불안정하다. 최근 조사들에 의하면 임금 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성에게 있어 사랑은 피난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전쟁터다. 우리의 삶을 질적으로 낫게 만들어주는 결혼이란 지금도 가능성보다는 판타지로 느껴진다. 그래서 무시받지 않고 사랑받는 여성, 인생 후반부를 육아, 감정적으로 소원해진 배우자를 위한 집안일에만 쏟지 않는 여성, 목표를 잃어가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는 승리담이다. 그리고 어떤 승리는 다른 승리보다 더 달콤하다.

배우 민디 캘링은 로맨틱 코미디가 ‘SF의 하위 장르’라며,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충만을 찾을 수 있다는 건 SF의 발상 중 가장 터무니없는 건 아닐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남성 파트너를 원하는 여성들은 공상을 해야 한다. 내가 괜찮은 남성을, 내가 주는 만큼을 주는 남성을 만난다면 어떨까? 내 남편이 나를 가장 열렬히 응원해 주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가 자기를 돌봐주기만을 바라기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최소한, 내가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피할 수 없는 희생조차 기쁨으로 느껴진다면?

수십 년 동안 로맨틱 코미디는 여러 가능성을 탐구해 왔다. 예를 들면 여성의 직업적 미래를 자신의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남자친구가 있었다(‘금지된 사랑’, ‘노팅 힐’이 그 예다). 그러나 이렇게 센티멘털한 설정 속에서도 여성들은 기대치를 낮추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은 많은 사실을 말해준다. 여성을 응원하는 친절한 남성은 딱히 잘생기지 않았거나 따분한 사람이다. 똑똑하고 잘생긴 남성은 개자식이다. 여성에게 잔인한 짓을 했지만 그녀가 섹시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후회한다(‘쉬즈 올 댓’이 그런 영화다).

영화에 그저 그런 남자친구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시의 관객들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가 가장 큰 공감을 준다. ‘유브 갓 메일’에서 멕 라이언의 독립 서점을 지키기로 한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은 1년 뒤 그 서점에서 결혼 반지를 낀 채 키스하며 파티를 준비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는 식의 지름길은 피한다. 멕 라이언은 자신의 조그만 가게와 대규모 할인 체인 사이의 엄청난 권력 차이를 느낀다. 그녀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더 많은 권력과 급여를 부여 받는 남성들에게 밀리는 것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90년대에는 더욱 그랬다. 그녀의 행복한 미래는 새로운, 어쩌면 만족도가 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커리어를 찾는데 달려 있었다. 그녀의 관심을 끄는 남성,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대표하느냐가 아닌(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좌파 컬럼니스트 프랭크는 그랬다) 그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남성을 만나는 게 중요했다. 게다가 그녀의 작은 가게가 그의 대형 체인 때문에 잃은 돈을 퇴행적 방식으로 벌충해 줄 돈 많은 남성과 사랑에 빠져야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다.

피터 카빈스키가 90년대에 로맨틱 코미디에 나왔다면, 그의 완벽함은 픽션에조차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하찮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가 정말 SF라 해도, 우리가 불신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엔 한계가 있다. 이 캐릭터가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이성애자들에게 희망을 준다. 세상이 정말로 달라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남성들(혹은 모든 여성들)이 완벽한 감정적 대처 능력과 너그러운 영혼을 지니고 연애에 임하는 세상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상상이 이젠 미친 생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소한 승리일 수도 있지만, 나 같은 여성들은 이런 승리에도 기뻐하곤 했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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