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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학교폭력의 악몽

학교폭력은 계급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의 축약판

ⓒhuffpost

물리적 폭력이든 심적 따돌림이든 그 후유증이 피해자를 보통 평생 따라다니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 학교폭력을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약 9~10%의 취학연령 아동들이 경험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학교폭력은 계급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의 축약판이다. 체벌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가정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도록 사회가 노력한다면 적어도 최근의 북유럽에서처럼 학교에서의 물리적인 폭력은 감소세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11월13일, 인천 중학생 집단폭행과 추락사 사건을 접하고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해자의 마지막 순간들을 상상하면 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 자체가 금방 사라질 정도다. 그런데 과연 끔찍했던 것은 마지막 순간들만이었을까? 가난하기에,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서 남들과 조금 다르게 생겼기에 학교에서 매일같이 모욕당하고 얻어맞아야 했던 아이의 삶 자체가 고문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보다 심적 따돌림이 훨씬 더 흔한 노르웨이에서마저도 따돌림 피해자들이 모욕으로 점철되고, 자존감 확립의 기회를 주지 않는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종종 있었다. 물리적 폭력이든 심적 따돌림이든 그 후유증이 피해자를 보통 평생 따라다니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 악덕한 고문과 다를 바 없는 후유증을 남기는 학교폭력을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약 9~10%의 취학연령 아동들이 경험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아무리 앞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과 같은 4만달러가 되고 미국과 같은 6만달러가 된다 해도, 가난과 ‘남과 다른 외모’ 말고는 지은 죄도 없는 아이가 고문을 당해야 하는 나라는 과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인천 중학생 추락사 사건을 생각하면서 나는 내 자신의 아동기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처럼 나도 중학교 시절에 줄곧 ‘왕따’로 살았다. 피해자가 ‘다문화’라고 야유를 당했다면 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과 폭력을 당했다. 피해자의 ‘다르게 생긴 얼굴’이 가해자들에게 문제(?)가 됐다면 나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모욕과 욕설을 듣곤 했다. 나의 경우나 내가 직접 목격한 다른 학교폭력의 경우에는 대개 피해자들의 내성적 성격과 주먹질 능력의 부족 등이 가해자들에게 폭력의 빌미를 주곤 했다. 물론 이미 혁명정신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말기의 소련이라 하더라도 한시간 반이나 진행되는 집단폭행이라든가 추락사 등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과도한 학습노동 스트레스와 과열 경쟁, 각자도생의 병리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면 보통의 10대 중반 아이들이 이런 일을 저지를 만큼 심성이 쉽게 난폭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단폭행도 아닌 모욕적 제스처나 폭언이라 해도, 계속 몇년간 듣다 보면 마음속에 응어리가 생기기에 충분하다. 나로서는 모든 민족들의 친선과 고상한 공산주의적 도덕률을 말로 선포하면서 실생활에서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아이들 사이의 약육강식을 말리지도 못하는 국가와 사회가 괘씸하기만 했다. 어른 사회의 언행불일치가 너무나 눈에 띄었던 것이다.

 

ⓒpiyawit ubonsatit via Getty Images

 

한데 나는 아동기에 폭력을 당하면서 계속 그 원인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타적 폭력 충동이 인간성의 내재적인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나는 일단 처음부터 일축했다. 나를 포함한 여러 폭력 피해자들도 분명히 같은 인간인데, 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가? 폭력이 ‘모든 인간들의 본능’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 상황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예컨대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수는 집에서 엄한 아버지로부터 체벌을 당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은 나같이 싸움에 약한 급우들에게 스스로 그런 ‘엄한 아버지’가 되어 체벌을 흉내 낸 폭력을 가함으로써 본인들이 집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었다. 가해 학생들이 가끔 보드카를 마신 채 집에 와서 주정을 부리는 아버지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아버지들이야말로 실은 그들의 롤모델이 아닌가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가해자들의 가정 배경과 함께 나는 가해자들이 나를 향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곤 했다. ‘뚱뚱보’나 ‘유대놈’이 제일 흔했지만, 빈도수로 따지면 그다음으로 많은 것은 ‘계집애 같다’와 ‘걸레’였다. 즉, ‘계집애처럼’ 주먹질이나 발차기를 제대로 못하고, ‘걸레’처럼 우유부단하며 비남성적이라는 뜻이었다. 나뿐만 아니고 유대인이 아니어도 근육질과 공격적인 남성성을 지니지 않은 다른 남자 급우들의 상당수도 피해자가 되곤 했다. 물론 이와 같은 남성관이 가해자들의 집안에서, 체벌을 일삼는 ‘엄한 아버지’로부터 전해진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학교나 사회는 이와 같은, 공격성 본위의 남성관을 방치하거나 부추기는 게 아닌가? 아동기의 나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어떤 커다란 모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면으로는 학교나 사회가 내세우는 이상은 분명히 폭력의 정반대였다. 전쟁은 자본주의 모순의 산물이며, 전세계가 공산주의로 진보하면 전쟁의 원인이 없어져 세계평화가 바로 확립될 거라는 것이 학교 사상교육의 골자였다. 수업에서는 ‘평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니카라과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미 제국주의 대리전이나 한국의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전두환 파쇼도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 등에 대한 비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학교나 사회가 제시하는 궁극적 이상으로 봐서는, 싸움에 무능한 나 같은 인간들도 분명히 머리를 똑바로 치켜들고 자존감을 가지며 살 수 있었다. ‘평화’는 우리의 주된 표어였기 때문이다.

한데 또 일면으로 이와 동시에 학교의 복도에 나갈 때마다 자동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실린 벽보를 읽을 수 있었다. 아프간에 파견되어 ‘반동세력에 대한 토벌’을 한다는 ‘멋진 군인’들을, 학교는 학생들에게 남성의 롤모델로 열심히 홍보했던 것이다. 벽보뿐인가? 자국, 즉 러시아 역사교과서는 거의 ‘우리나라 명장들’의 전시관이나 다름없었다. 각종 ‘명장’이나 ‘대첩’들의 그림과 함께 아이들의 어린 머리에는 일종의 군사주의적 선악 이분법이 주입되곤 했다. ‘우리나라’가 관련된 전쟁이라면 ‘우리’는 완전무결, 절대선 그 자체여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소련 군인들이 점령지 독일 등지에서 자행한 성범죄 같은 것은,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군인’은 상남자 그 자체였다. 거기에다가 교련수업이나 저녁마다 티브이가 보여주는 전쟁 관련 영화 등등. 가해 학생들에게 ‘싸움질 잘하는 남자’가 ‘정상’으로 보이고 나처럼 ‘싸움질 못하는 남자’는 모욕해도 되는 ‘비정상’으로 보인다는 것이 어쩌면 이런 자가당착의 사회에서는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 그 당시 나의 결론이었다.

학교폭력은 계급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의 축약판이다. 북유럽처럼 가정에서의 체벌까지 엄금하고 학교마다 주기적으로 폭력방지 역할극을 조직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피해자의 심정을 체험케 하는 등 촘촘한 예방책을 세운다 해도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는 확실하다. 체벌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가정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도록 사회가 노력한다면 적어도 최근의 북유럽에서처럼 학교에서의 물리적인 폭력은 감소세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는 가해 학생들의 롤모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폭력적 남성성 쪽으로 이끄는 학교교육이나 대중문화에서의 군사주의적 선전에 대해 한국 사회가 스스로 성찰했으면 좋겠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이 대한민국의 후속세대가 정말로 보고 배워야 하는 남성성의 적합한 아이콘인가? ‘아군’이 반세기 전에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학살과 성범죄에 대해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비군사적·비폭력적 세계관의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각종 병영체험, 극기훈련을 시키는 것은 결국 군사적 폭력을 합리화하게 만들 수 있는 야만적 행위가 아닌가?

정말로 행복한 나라는 강병의 군국도 아니고 1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의 부국도 아니다. 다르게 생기고 돈 없고 싸움을 못한다 하더라도 약자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나라야말로 살기 좋은 나라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런 나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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