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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생각

”형, 이거 진심 아닌거 알죠?”

ⓒhuffpost

‘정상적인 여성’에 대한 생각

최근 브랜뉴뮤직 연말 콘서트에서 산이가 겪은 일을 보고 처음에 든 감정은 안타까움과 유감스러움이었어. 관객들이 모두 욕하고 야유를 퍼붓는데 누군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가 저 자리에 서 있다면 얼마나 힘들까? 누군들 저렇게 냉랭한 무대 위에 서면 멘탈이 붕괴되고 화가 날 만하지도 않을까?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그가 뱉은 ”저는 정상적인 여성분들을 지지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딱히 유감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어. 정상과 비정상이 있다는건데, 그걸 자기가 나누겠다는 뜻이 아니면 무엇일까? 비정상적인 여성은 누구고, 무엇을 기준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일까?

조신한 행동, 나긋나긋한 목소리, 남자들한테 이뻐 보이게 가꾸고 다니는 것, 남자들이 던지는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듣는 것, 잘 웃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과격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이런 게 정상적인 여자라면 과연 칭찬일까? 스웨그(swag,허세)를 리스너들의 귀를 여성으로 묘사해 강간하는 것으로 표현하거나 디스를 상대를 여성으로 환원해 여성성을 비하하는 표현들로 소비하는 힙합문화에 딱히 거리낌 없던 산이가 인정하는 ‘정상적 여성’이란 대상화를 즐기는 것, 수동성을 여성성으로 강조하는 욕으로밖에 이해하기 어려워. 아래는 산이가 써오던 가사들이야.

“LP 형, 이건 어때? King of 처녀받이
어? 무섭단 네 표정 일본 AV 배우
오빠 믿고 벌려봐, 처녀귀야
첨에는 좀 아프고 그런게 첫 경험이야, 크크크”
- 버벌진트, 2008 대한민국 (산이파트)

″씨뿌려 출혈과다 생리중인 니 귓구녕”
- 페임제이, Sniper Sound vs Over Class (산이파트)

산이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국에 맞춰 대통령을 욕하는 노래(나쁜년)를 낸 후 개념래퍼라는 칭찬을 들었어. 하지만 그 곡의 가사도 정치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보다는 바람핀 여성을 욕하는 와중에 중간중간 최순실, 하야 등의 언어유희만 들어있는 곡이었어. 가사에서 공격하는 것은 바람핀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공격이 전부였어. 그가 디스표현으로 사용해오던 여성환원/비하적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아.

″충혈된 네 눈 홍등가처럼 빨개”

-나쁜년 중

산이에게 묻고 싶어. 정상적인 여자란게 뭘까? 성희롱 섹드립을 수줍게 듣고 넘기는 사람이 정상적 여성일까? 숏컷을 하지않고 다리털을 잘 밀고 다니면 여성일까? 그걸 왜 산이가 규정할까?

 

 

소신 있는 사회비판에 대한 생각

아마도 산이는 차일디쉬 감비노의 노래(this is america, 2018)를 듣고 사회이슈에 대해 멋지게 말하고 싶어진 것 같아. 2016년에 박근혜 대통령을 욕했을 때 들었던 개념래퍼라는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굳히고 싶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의 가사에는 개념래퍼 소신래퍼 이미지에 대한 욕심은 보이지만, 사회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있어. 화끈하게 미국사회를 비판했던 감비노와는 달리 그의 가사를 보면 이슈들을 나열만 해놓으면서, ‘둘 다 틀렸어‘(양비론), ‘둘 다 좋아‘(양시론), ‘우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안 하느니만 못한 얘기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어.

코끼리가 다람쥐의 꼬리를 밟고 있는데 ”둘 다 잘한거 없어. 싸우지말고 잘 지내.”라고 하는건 그만큼 이해와 공감이 결여되어있는거지. 다람쥐가 성이 나 소리 지를 때, 왜 저렇게 성이 났는지, 코끼리가 꼬리를 밟고 있었다는 것까지 바라보고 진단을 해야지. ”너네 다 시끄러워. 한남 김치 우익 좌익”은 사회이슈를 건드리지도 못하는 말들이야.

남성들이 여자친구와의 성관계를 몰래 촬영한 후 여자친구가 이별을 고하면 유포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문화, 단돈 100원에 팔린 성관계 유출 비디오로 억만장자가 된 웹하드 회사 사장, 여성이라서 강남역 화장실에서 피살당한 사건, 이러한 사회문제들이 공공연한 가운데 ”싸우지 말고 다같이 사랑하자”니 얼마나 얕은 생각일까? 그가 ‘성평화‘, ‘정상적인 여성’을 지지하려면, 워마드가 아니라 이런 여혐에 젖은 남성들을 먼저 비판해야하지 않을까?

최근 산이는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해 소신껏 얘기하겠다고 했어. 그의 생각은 입장과 상관없이 환영할 일이야. 나는 진심으로 사회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래퍼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다만 이슈를 이야기하면, 어느 쪽이든 욕먹거나 팬이 떨어지는 건 필연적이라는 것도 이해했으면 좋겠어.

페미니스트를 욕하는 곡을 냈다가, 팬들이 떠나자, 페미니스트를 욕하는 사람을 욕하는 곡이라는 해석본을 올렸다가, 콘서트에서 욕먹자 다시 페미니스트들을 욕하는 그의 행보를 보면 줏대는 물론이고 비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일을 벌여놓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어.

방구석에서 버벌진트를 신명나게 욕하면서(재밌쎄요, 2008) 끝에는 영어로 ”형, 이거 진심 아닌거 알죠?”라고 써두었다가. 운좋게 버벌진트에게 러브콜을 받아 데뷔했던 산이에게 ”나 욕한거 아님;;”은 생존전략이 되었을 수도 있어. 쇼미더머니를 디스했던 빈지노를 욕했다가도 다시 욕먹자 ”나 디스한거 아님;;”이랬다가 랩찌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받기도 했지. 최근에는 페미 논쟁에도 한 발만 걸쳐두고 얘기하려 했는데 안티가 늘어나니까, 휩쓸리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워.

하지만 사회적 문제는 래퍼끼리 디스하다가 다시 웃으며 화해하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야. 이 편 저 편 간보면서 다루기에는 너무 누군가의 생활에 너무 맞닿아 있는 주제들이야. 성희롱, 성추행을 한 번이라도 당한 여성들은 ”난 페미 싫어. 남혐하지마, bitch, 사실 난 페미니스트야.” 따위의 그의 말에 웃으며 화해할 수 있을까?

‘리얼힙합 정신’에 대한 생각

어떤 사람들은 힙합은 원래 이런 문화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해. 리얼힙합마인드. 뤼얼힙합 정신이 어쩌고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블랙넛이 여성래퍼 가슴을 비하할 때, 힙합으로 공격받으면 힙합으로 받아쳐야지 정색하지 말라고 하던 이들이 생각나. 리얼 본토 래퍼들은 이런거 갖고 법정에서 안 붙는다고. 리얼 래퍼면 랩으로 승부해야한다고.

니 여자친구를 따먹었다, 걸레, 가슴 껌딱지등 혐오워딩이 드러내놓고 돌아다녀도 그들은 전부 가만히 있었어. 원래 힙합은 어쩌고, 미국본토에선, 힙합정신이 저쩌고 하면서, 표현의 자유 억압하지 말라면서.

표현의 자유, 예술. 다 좋아.
근데 리얼 힙합정신 좋아하시던 분들이 6.9cm보이 한마디에 왜들 발끈하시는 걸까?
키디비에게 이런거에 정색하지 말라고 하던 리얼 힙합 리스너들은 다 어디로 간걸까. 데뷔 곡부터 여성 생리 비하 표현등 성 혐오워딩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오던 산이가 겨우 6.9센티보이, 산이 죽은이 몇마디에 유튜브 방송 올리고 먼저 성희롱 당했다고 찡찡거리는 걸 왜 진지하게 들어줄까? 뭘 새삼스럽게. 리얼 힙합 정신에 어긋나게?

산이가 어서 힙합 스퓌릿을 되찾고 리얼 힙합 표현 정신에 맞춰서 랩네임도 산이 더 소추소심보이 이런 걸로 했으면 좋겠어.

리얼힙합이라며.

즐겨야되는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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