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KTX 탈선 열차 탑승자의 증언으로 본 당시의 자세한 상황 "군인 승객이 구조"

열차가 기울자 김씨를 비롯한 승객들과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한겨레/김경민씨 제공

8일 오전 7시30분께, 직장인 김경민씨가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는 케이티엑스(KTX) 806호 산천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오전 9시31분께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영하 10.5도의 한파를 녹이기 위해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김씨의 자리는 4호차 1에이(A). 열차 출입문 바로 앞이었다. ‘오랜만에 맨 앞 좌석에 앉았다’는 기쁨이 10분 정도 이어졌을까. “갑자기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느낌”으로 열차가 흔들렸다. 곧 무슨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열차는 50도쯤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열차가 기울자 김씨를 비롯한 승객들과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열차 출입문 쪽을 살피니 승무원도 쓰러져 있었다. 김씨가 탄 열차가 바로 이날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다.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 4호차 내부 모습. 김경민씨 제공.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 4호차 내부 모습. 김경민씨 제공. ⓒ한겨레/김경민씨 제공

김씨는 차분하게 행동했다. 옆자리 승객과 더 기울어질 위험은 없는지 상의하고, 쓰러진 승무원을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별일 아니지만 알고 있으시라”고 말했다. 김씨는 차분했지만, 같은 칸 승객 가운데 나이가 있는 승객들은 ‘공황 상태’였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이 인사불성이 되어서 부축의 손길을 잡을 여유도 없이 앞을 향해 가시다가 계속 넘어지셨어요.”

쓰러져 있던 승무원은 긴급한 목소리로 “잠시만 대기해 주십시오. 제가 앞칸에 가서 방송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3분쯤 지난 뒤 통로 문이 열리자 승객들은 알아서 기울어진 열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함께 재난을 당한 승무원, 기관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시에 따르기에는 지시가 너무나 엉성했고, 승객들이 오히려 침착하고 신속했습니다.”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의 모습.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의 모습.  ⓒ한겨레/김경민씨 제공

케이티엑스 열차를 운행하던 기관사와 열차팀장, 승무원들의 열차 탈출이나 안전 지시가 제대로 공지되지 않는 사이,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승객으로 열차에 탄 군인들이었다. 승객이었던 군인들은 어느새 안전요원이 되어 ‘공황 상태’인 승객들에게 “짐은 제게 주세요”, “일단 난간에 앉으세요”라며 ‘차근차근 훈련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씨는 “공군으로 추정되는 몇몇 친구들이 열차 출입문 앞에 서서 승객들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아주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거의 안아서 내려드렸다”고 전했다. 김씨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났다.

사고가 나고 20분쯤 지난 오전 8시께, 현장에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은 부상자, 노약자들을 우선 챙기며 상황을 수습했다. 김씨가 20분 만에 처음으로 들은 공식적인 ‘안내의 말’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승객들이 알아서 탈출하거나 ‘선로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선로에 아직 전기가 흐르는 것으로 확인되니 근처에 서 있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미 20분 동안 선로를 밟으며 돌아다니고 그 주변에서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의 모습.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의 모습.  ⓒ한겨레/김경민씨 제공

오전 8시14분께, 강릉역장이 추위 속에 대기 중이던 승객들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강릉역장입니다. 버스가 지금 오고 있거든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스마트폰으로 확인해보니 영하 6도의 날씨였지만,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롱 패딩을 입은 김씨도 슬슬 추워지더니 ‘발가락이 정말 꽁꽁 얼어붙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근처에 사는 한 시민이 자신의 비닐하우스에 승객들을 들이지 않았다면, 김씨는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을 기다릴 뻔했다. 버스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1분께, 사고가 난 지 1시간20분쯤 지났을 때였다.

버스 오른 김씨에게 열차가 탈선할 때 눈앞에서 쓰려졌던 승무원이 다가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큰 사고가 나서… 다치신 분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고….” 승무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버스 안 여기저기서 “괜찮아요.”, “괜찮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승무원이 신은 중간 정도 높이의 힐로 된 구두에는 여전히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나는 오늘 롱 패딩에 후디, 진을 입고 울드스쿨(운동화)을 신고도 춥고 힘들고 발이 깨질 것 같았다. 아까 쓰러졌던, 그리고 지금은 사과하러 다니고 있는 저 승무원은 어땠을까. 현장에서 시뻘게진 눈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도 춘추복 교복 같은 거 하나 달랑 입고 또각구두를 신고 왔다 갔다 했더랬다. 영하 6도에.”

이상은 김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케이티엑스 열차 탈선 사고 당시 현장의 기록이다. 김씨의 고발을 통해 이번 탈선 사고 당시에도 재난 현장 탈출이나 안전 관련 업무에 대한 공식 대처가 부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승객들은 코레일이나 열차 기관사 등의 공식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알아서 각자도생했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코레일의 인력 감축에서 비롯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사고가 난 10량짜리 806호 산천 열차에는 기장과 열차팀장, 승무원 등 모두 3명의 코레일 혹은 코레일 자회사 직원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198명의 승객이 탄 열차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공식 담당자는 ‘열차팀장’ 한 사람뿐이었다.

‘안전업무’와 ‘승객서비스’ 업무가 인위적으로 분할된 코레일 방침상 케이티엑스에서 안전업무는 ‘열차팀장’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은 출입문 개폐나 제어안전장치 취급 등 안전업무를 맡게 되어 있고, 코레일 자회사 ’코레일관광개발‘ 소속 승무원은 승객인사, 승차권 확인, 안내방송 등 승객서비스 업무를 맡도록 업무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사고 열차에서 안내방송을 하고, 현장을 뛰어다니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과했던 승무원은 엄밀히 말하면 ‘안전업무’ 담당이 아니었다.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의 모습. 
8일 오전 7시35분께 강릉선 남강릉 부근에서 198명의 승객을 태운 채 탈선한 케이티엑스 열차의 모습.  ⓒ한겨레/김경민씨 제공

케이티엑스 승무원이 ‘안전업무’에서 배제된 채 ‘승객서비스 업무’만 하는 이러한 인위적인 ‘분할’은 2006년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내자 코레일 쪽에서 열차팀장과 승무원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탄생했다.

2015년 2월 대법원이 원고(케이티엑스 해고 승무원들) 패소 판결을 하면서 이 분할은 법원 판결로 공식 인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열차팀장은 케이티엑스 차량 전부를 순회하며 안전업무를 수행한 반면, 승무원은 이와 별도로 각 담당 구간을 순회하면서 승객 응대 업무를 수행”했다며 “화재 등 비상상황 발생 시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승무원이) 안전업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으나 이는 이례적인 상황에 응당 필요할 조치일 뿐이며, 승무원의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열차팀장과 승무원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코레일 쪽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문제는 법원이 이러한 ‘구분’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8월7일 국회에서 열린 ‘생명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KTX 승무원, 무엇이 이들의 직접고용을 가로막는가’ 토론회에서는 대법원과 코레일이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의 업무에서 ‘안전업무’를 따로 뗄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토론회에서 발언한 14년 경력의 현직 케이티엑스 승무원 김원희씨는 “(KTX) 개통 초기만 해도 소속을 떠나 승무 업무가 안전업무라는 것에는 논란의 소지가 없었다. 열차팀장 주관으로 업무회를 하고 지시에 따라 열차 내 업무를 수행하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업무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며 “2006년 파업을 기점으로 공사 직원인 열차팀장은 안전업무를 맡고 자회사 소속인 승무원은 서비스 업무를 해야 한다며 억지스럽게 업무를 분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차내 안전을 열차팀장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힘든 것을 넘어 불가능하다”며 “매일같이 하는 일이 안전업무인데 안전업무인 걸 입증하라고 하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대법원이 공인한 철도공사의 임의적인 업무 ‘구분’이 철도안전법과 충돌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세월호 이후 국민의 생명안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따라 2015년 7월 개정된 ‘철도안전법’ 제40조2항은 ‘여객승무원이 철도사고 등의 현장을 이탈하지 말고 국토부령으로 정한 안전업무를 수행’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를 위반해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고, 사상사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안전 조처를 수행하지 않은 경우 과태료 처분을 물리도록 했다. 또 철도안전법 시행규칙은 ‘기관사와 열차승무원이 함께 승객의 안전을 위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승무원은 안내방송, 여객 대피, 비상문 개방, 응급처치 등을 할 것을 명시해놓았다.

박세중 철도노조 정책실장은 “철도공사가 임의대로 안전 담당과 승객서비스 담당으로 나누는 것은 철도안전법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승무원들은 자회사에 묶어두기 위한 이런 인위적인 ‘구분’이 승객 안전을 사각지대로 밀어 넣고 또 다시 각자도생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KTX 승무원은 안전업무를 하면 파견법을 위반하는 상황이라 평소에 긴급 상황에 대비한 교육 훈련이나 매뉴얼이 따로 없다”며 “그나마 진행되는 승무원에 대한 안전교육은 분기에 6시간씩 듣는 인터넷 강의가 전부”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건/사고 #KTX 승무원 #강릉선 KTX #KTX탈선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