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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개월 대체복무"는 속임수다

노예 아래의 노예를 새로 만드는 행위

ⓒhuffpost

 

우리는 간혹 뉴스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나 독립유공자들이 폐지를 주우며 힘겹게 살아가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국가와 이웃들을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현실에 개탄하고 분노한다. 국가유공자들이 넉넉한 여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폐지를 주우며 산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다른 국가유공자들도 모두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일 것이다. 이 문제의 요점은 국가 공동체에 충분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당 대접을 못 받는 상황에 있지, 모두가 공평하게 불행을 공유해야 한다는 데에 있지 않다. 

 

“징벌적” 징병제

한국에서 징병제는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쩐지 이 문제 앞에서는 모두가 불행 경쟁을 하면서 네거티브한 이야기만 하게 된다. 결국 길게는 과거의 군 가산점 문제부터 최근의 젠더 문제, 여성 혐오, 대체복무제 논쟁까지 징병 당사자들의 존재 자체가 모든것을 지워버린다. 그런데, 문제는 징병 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지 않다.

 

ⓒIm Yeongsik via Getty Images

 

한국은 징병제가 그 자체로 매우 징벌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일단, 한국과 그나마 비슷한 수준인 오스트리아나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도 현역병 복무기간이 6개월에서 1년을 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국가들의 기간병들은 일과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행동이 가능하며 개인의 자유가 상당히 보장되어 있는 편이다. 그리고 국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20대 후반이나 30대가 되면 징집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흔히 한국에서 징병제를 이야기 할 때 애국심과 보편 징병의 표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스라엘도 실제로는 굉장히 다르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봤을때 굉장히 느슨(?)하게 징병이 실시된다. 일단 유대인들과 드루즈인들만 징병 대상자로 분류되며 기독교도, 체르케스인, 이슬람교도들은 지원에 한해 입대한다. 최근까지 유대교 근본주의 종파인 하레디는 유대경전 연구소 재직으로 군 복무를 계속 연기할 수 있었다. 또한 징집률이 느렇게 높은 것도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병역 면제를 받고 있으며 1990년대 75퍼센트를 자랑하던 입영율은 2015년 기준 50퍼센트 미만으로 급락했다. 다시 말해, 징집 대상자들을 전부 다 입대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현역병들의 처우가 한국과 별 다를바 없을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현역병들에게 한달에 600셰켈(약 20만원)에 달하는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고, 버스와 기차 표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현역병들은 다양한 업장에서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주말에는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군 복무가 끝날 때 전역자들은 교육, 주택, 결혼에 관한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외국 국적 유대인이 지원하여 복무한 경우 민영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다. 더 놀라운 것은 대체복무자들도 이와 같은 보상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징병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사시에 인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제도로 기능하고 있지, 성인이 된 남성들을 한명의 열외 없이 한 곳에 집합시키는 제도가 아니다. 한국처럼 운용되는 징병제는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 물론 낮은 급여와 자유의 제한에 고통을 받는 군대들이 있기는 하나, 한국과는 많이 상황이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대부분이라 단순 비교가 어렵다.

 

공짜 인간의 군대

 한국군은 오랫동안 병사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지 않았다. 1950년 당시 이등병 월급은 3천원으로 당시 소위 월급(3만 9천원)의 10분의 1 수준이었고 대장 월급(9만원)의 300분의 1 수준이었다. 창군 당시 부실하게 설정된 군 급여는 전쟁의 혼란을 거친 후 별다른 이유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한국군의 군 문화와 군기는 대체로 일본군이나 중국 국민당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 두개의 군대에서 병사들은 “가만히 두면 딴 생각 하고, 언제든지 통지서 한 장이면 끌고 올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러한 군대는 병력 통제를 위해 병사들을 언제나 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선진국의 대부분의 군대들이 일과 시간 이후에는 전력 보존을 위해 개인 시간을 보장해주고 교육기회와 복지를 제공하려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한국군은 이러한 구닥다리 군대가 유지되는 바람에 “군대는 비상식적으로 불편한 곳이고 징병제는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인습적 관념이 자리잡았다. 비로소 “징벌적 징병제”가 완성된 것이다.

 

ⓒJim Sugar via Getty Images

 

 

 60만 대군이라는 오래된 습관

 이러한 왜곡된 관념은 군 문화와 국방을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개혁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 결국 이 해묵은 논쟁은 한동안 무의미한 군 가산점 제도 논란으로 이어지다가, 근래에는 여성징병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징벌적 대체복무 논쟁으로 이어졌다. 애초부터 한국의 징병제 자체가 거의 노예제나 다름 없기 때문에 무슨 이슈를 결합시켜도 논쟁이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징병제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 본 적이 없고, 병사들에게 정당한 급여를 지불하는 사회를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징병제는 개선되어야 한다”거나 “대체복무가 징벌적이어서는 안된다”라고 이야기 해 봤자 동굴 밖의 이데아의 슬픈 외침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국군이 돈이 없는 군대도 아니다. 또한 한국이 돈이 없는 나라도 아니다. 이미 한국은 1인당 소득 3만불을 달성하여 세계 열강의 일부가 되었고, 세계 7위의 군사 강국이며, 약 400억달러(한화 약 44조 5400억원)을 국방 예산으로 쓰고 있는 국가다. 한국 정부는 현역병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지급 할 자원이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60만 대군에게 어떻게 다 월급을 지급하느냐”며 반박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한국군은 국토 방위의 목적보다 미국에 의한 군사 원조를 타내기 위해 병력 규모를 설정해 놓았다. 제 3대 국회의 제 25회 제 43차 본회의록(1957년 7월 26일)에 작성된 내용을 보면, 실제로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우선 72만 문제를 말씀드리겠읍니다…(중략)...이 근거는 하나는 한미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중략) 거기에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육군 66만 1000 명 해군 1만 5000명 해병 2만 7500명 공군 1만 6500명 계 72만에 대해서 미국은 원조를 해 주겠다 이것입니다. 72만이라는 그 숫자에 기초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중략) 제발 72만의 이면을 말씀 안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의중에 있는 말을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하는 부분이 있다(당시에는 한국군이 72만명이었다). 오히려 당시 국회의원들은 재정에 비해 군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 때 설정된 군의 규모는 별다른 논의 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군의 규모는 군사정권 시대에는 군부가 무서워서, 민주화 이후에는 북한이 무서워서 신성 불가침 영역으로 남았다. 현재 60만 대군이 왜 60만인지, 과연 북한을 막는데 왜 60만이 필요한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군의 규모는 국토 방위를 위해 정확해야 한다. 그래야 세금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더러 유사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정부의 거의 모든 부처가 재정 관리에 대해 엄혹한 감사를 받고 있지만 국방부만은 어쩐지 예외다. 여기에 매해 20만명의 공짜 인력도 공급받고 있다. 이렇게 허술한 체계의 틈새시장을 노린 방산비리는 대개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

 군대는 숫자가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전쟁은 국제 정치의 일부이자 정치의 가장 극단적인 이벤트다.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명분을 잃는 바람에 패배한 베트남전의 경우도 있지만, 최소 18:1의 교환비를 기록한 이라크전도 있다. 현재 한국군은 인력만 많은 구조이기 때문에, 만일 한국이 전면전에 돌입한다면 대규모 전사상자가 발생 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전사상자의 치료, 보상, 복지에 관한 비용을 감당 할 수 있을까? 한국군은 실제로 상이용사들과 보훈대상자들을 장기간 방치했다. 미국이 딱히 착한 나라라서 징병을 중단한 것이 아니고, 특별히 평화적이어서 지상군 투입을 최소화 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장병 개개인에게 보상해야 하는 금액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은 이러한 점을 근거로 첨단 무기와 장비를 도입했다. 그러나 미군이 1974년 징병을 중단한 이후로 약체화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예 아래의 노예를 새로 만드는 행위

한국군은 여전히 군 복무자들을 위해 돈 쓰기를 꺼려한다. 왜냐하면 비록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역행하더라도 현역병들을 그대로 두는것이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본권을 제한당하고 곤궁한 상황에 빠지면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인데,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행위는 둘 중 하나다. 누군가가 노임을 수탈하고 있거나, 그 자체로 아무런 지불 가치가 없는 행동이거나.

 

ⓒSIPA USA/PA Images

 

이런 점에서 대체복무 기간을 교도소 근무로 한정하고, 36개월간 현역병과 똑같이 합숙시키는 것은 현역병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으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대체복무가 더 불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역병에게 정당한 댓가가 돌아가야 옳다. 게다가 대체복무의 조건 중에 합숙을 무조건 포함시키는 것도 넌센스다. 이스라엘은 대체복무 신청자의 거주지 대체복무 TO가 넘치면 관계당국이 해당 인원을 다른곳으로 배치해준 뒤 해당 지역의 숙소를 준비 해준다. 결국 국방부 스스로 한국의 징병제의 핵심은 국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금과 자유권 박탈을 통한 강제 훈육화에 있다는 것을 자백한 셈이다.

예비역들, 그리고 앞으로 군대에 갈 사람들 및 보수주의자들이 대체로 대체복무를 반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대체복무를 어렵게 설정하는 의도는 어디까지나 현역병의 복무 여건 개선을 느리게 만들기 위함일 뿐 그 자체로 아무런 효용이 없다.

다른 성별이나 계층에게 군 복무 경험을 알아달라고 예비역들이 아무리 떼를 써 봤자 알아 줄 리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예비역들은 언제나 군대 안에서의 경험은 예비역들만이 알고 있다고 ‘군부심’을 담아 이야기 하는데, 이는 일정부분 사실이다.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문제를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단 한가지의 해법만이 존재한다. 바로 현역 복무를 마친 이들에게 그에 맞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군 복무가 가치있는 일 이었음을 증명할 증거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이제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제는 군 복무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안악희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서울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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