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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사망한 조지 부시가 LGBTQ에게 얼마나 재앙을 끼쳤는지를 지우고 있다

부시는 레이건과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따랐다.

ⓒASSOCIATED PRESS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미디어에서 논객들, 대중 역사가들이 그의 재임 기간에 대한 긍정적 글을 쏟아내는 것도 놀랍지는 않다.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인 지금은 과거의 모든 공화당 지도자들을 향수와 호의를 담아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제일 먼저 내 시선을 끈 것은 CNN 웹사이트의 보도였다. 미국 전역에 걸쳐 홈리스 청소년들의 보호소를 제공하며 역사적으로 가톨릭과 관련이 있는 커버넌트 하우스(Covenant House) 회장의 트윗이 들어가 있었다. 이 트윗에는 조지 H. W. 부시와 당시 영부인 고 바바라 부시가 아이들을 안고 있는 사진이 들어가 있어, 부시가 AIDS에 걸린 사람들의 중요한 벗이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클레어와 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부시가에 우리의 사랑과 지지를 보낸다. 우리 @CovenantHouse 에서 HIV와 AIDS 감염 아동들을 격리시키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조지와 바바라 부시는 그들을 꼭 안아주었다. 이 천사들이 신의 왕국에서 그를 환영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저명한 역사가 존 미첨의 말을 인용한 야후 뉴스의 트윗을 보았다. 부시가 “자신이 공화당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그건 아주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다.”라는 말이었다.

“조지 H. W. 부시는 자신이 공화당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믿었다. 그건 아주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가 존 미첨이 조지 H. W. 부시의 대통령으로서의 리더십에 대해 한 말

 

부시가 그렇게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부시의 전임자 로널드 레이건은 종교적으로 독실한 보수 세력을 강력한 정치적 힘으로 키웠고, AIDS가 큰 문제로 대두되던 1980년대에 그들의 반 LGBTQ 아젠다를 따랐다. 부시 역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레이건 못지 않게 복음주의적 우파를 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레이건이 AIDS를 냉담하게 무시했던 것은 잘 기록되어 있다. 레이건 시절 부통령이었던 부시는 취임 당시에는 레이건보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대통령직 수행을 약속했다. 1990년에는 AIDS에 대한 연설도 했다. 비유는 많이 늘어놓았지만 전략과 예산 투입 의지는 짧은 연설이었다. 초대 손님이었던 당시 전미 게이 레즈비언 태스크 포스(현 전미 LGBTQ 태스크 포스)의 우르바시 바이드 회장은 전례없는 영웅적 행동을 했다. 연설 중에 일어나서 ‘말은 공짜다. AIDS 예산은 공짜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든 것이다.

부시는 결국 AIDS와 LGBTQ 인권에 있어 레이건과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따랐다.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듯, 부시는 레이건이 데려온 복음주의자들을 밀어내기는커녕 그들이 공화당 내의 운동으로 성숙하도록 했다.

 부시는 HIV 감염인을 포함한 장애인을 차별에서 보호하는 미국장애인법에 서명하기는 했다. 1990년에는 빈곤층의 AIDS 치료비를 연방이 보조해주는 라이언 화이트 법에 서명했다(의회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받은 법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헨리 왁스맨 하원의원 등 끈질긴 민주당원들이 몇 년이나 노력한 결과였고, 법안의 효력은 미미했으며 도입 시기도 늦었다. AIDS가 퍼지기 시작한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고, 미국에서는 15만 명의 HIV 감염이 보고되었고, AIDS 사망자는 이미 10만 명이었다.  

부시 정권은 약물 치료도 질질 끌었으며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게이와 양성애자 남성 커뮤니티에서의 예방도 거부했다. 안전한 섹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홍보하고 콘돔만 배포했어도 될 일이었다. AIDS 활동가 단체인 ACT UP이 백악관과 부시가 여름 휴가를 보내는 메인주 케네벙크포트에서 부시를 겨냥했을 때, 부시는 ‘행동 변화’가 AIDS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부시가 TV 인터뷰에서 손자가 게이라면 그 아이를 “사랑”은 하겠지만 정상이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악명높다. 레이건처럼 그는 반 게이 광신자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HIV에 대한 끔찍한 대응으로 ACT UP의 시위 대상이 되었던 루이스 설리반 보건부 장관은 복음주의자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 LGBTQ 십대가 위험이 높다는 십대 자살에 대한 정부 주도 연구를 덮었다.

부시는 다른 증오범죄들과 함께 반 게이 증오범죄 데이터 수집을 허가하는 혐오범죄통계법에 1990년에 서명했고, LGBTQ 이민자를 금지하는데 쓰이던 ‘성적 도착’을 이민법에서 제거했지만, 보수 논객이자 레이건의 고문이던 팻 부캐넌이 1992년 공화당 경선에서 강하게 도전해오자 겁을 먹고 극우로 확 돌아섰다.

미국 국립 예술 기금(NEA)이 퀴어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것을 문제삼은 우파 국회의원들로부터 시작된 반 게이 공격에 부시도 합세했으며, 부시가 앉힌 여성 회장 대행은 게이와 레즈비언 영화제 자금 지원을 끊었다. 그해에 부시는 의회가 결국에는 각하할 수 있는 조직인 워싱턴 D.C. 위원회가 게이와 레즈비언 시 직원들의 동거 파트너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부시는 부캐넌에게 휴스턴의 공화당 전국 위원회에 좋은 자리를 주고, 악명높은 ‘문화 전쟁’ 연설을 하며 미국에서 ‘종교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공격적 동성애자 인권운동’들을 마구 비난했다. 부시는 이 연설을 취소하기를 거부하며 당시에는 현실 근처에도 오지 못했던 동성 결혼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래서 가장 규모가 큰 동성애자 공화당 조직인 로그 캐빈 리퍼블리컨스조차 부시를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그 해 공화당은 공약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을 보호하는 반 차별 지위를 비난했다.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이 게이의 군복무 금지를 해제하겠다고 약속하자, 게이 군복무 금지 공약을 집어넣었다.

군 문제는 부시가 남긴 유산과 부시가 LGBTQ 인권에 대해 공화당을 이끈 방향을 규정해준다. 1991년에 내가 디 애드버킷에 쓴 글이 논란이 되었다. 나는 걸프전 내내 매일 TV에 등장한, 걸프전의 얼굴이었던 국방부의 피트 윌리엄스가 공개는 하지 않았지만 게이라는 것을 밝혔다. 당시 국방부는 군대에서 게이 남성과 레즈비언들을 쫓아내며 그들이 아우팅 협박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게이임을 공개한 사람일 경우에도 이 논리를 들이댔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수십 년 전의 정책이었던 게이 군복무 금지는 부시 집권 중 더욱 도마에 올랐다. 커밍아웃하고 군대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피트 윌리엄스를 애지중지했던 딕 체니 국방장관은 윌리엄스에 대한 내 기사 때문에 샘 도널드슨과 했던 ABC 뉴스 인터뷰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체니는 반 게이 정책과 자신은 거리가 있다며. 자신은 이 정책을 ‘물려받았고’, 윌리엄스가 사임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며 공무원은 정부가 자신들의 ‘사생활’에 침입하지 않게 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부시 정권이 게이 군복무 금지를 철폐할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같은 주에 커밍아웃한 게이 하원의원 바니 프랭크의 질문에 페니가 게이 군복무 금지 정책이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답해서 그런 추측이 일었다. 이런 행동들로 인해 빌 클린턴 후보는 게이 군복무 금지를 철폐하겠다며 게이 유권자들을 끌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은 게이 군복무 금지 정책을 바꾸려는 구체적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1년 후 부캐넌이 부시를 위협하자, 부시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며 LGBTQ를 악마화했다.

부시가 당선되었을 때는 레이건 시절의 종교적, 도덕적 십자군 운동과는 다른 통치를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임기를 마쳤을 때는 자기 아들이 더욱 반 LGBTQ 행정부를 구성해, 공화당 내에 보수 종교적 세력의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도록 밑바탕을 깔아놓았다.

그리고 그 당은 현재 도널드 트럼프를 자랑스럽게 지도자로 내세우고 있는 당이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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