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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섬에서 선교사가 죽었다고 기뻐하지는 말자. 하지만 순교자로 만들지도 말자

문제는 그의 의도가 아니다.

ⓒINDIA TODAY

11월 17일에 선교사 존 차우(26)는 인도 북센티넬섬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러 갔다가 살해 당했다. 차우는 이전에도 불법적으로 북센티넬섬에 접근한 적이 있으나, 자신과 예수를 소개하려다 섬 주민들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미국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차우가 북센티넬섬 사람들에게 병을 옮겨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역사적으로 선교 활동에 동반된 문화적 대량 학살을 일으키는 식민지 개척의 내러티브라고 주장했다. 반면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그를 순교자라 칭하며 그의 사연과 죽음을 신앙 때문에 살해 당한 다른 선교 시도에 비교하고 찬양 일색으로 묘사하고 있다.

차우가 다른 주요 종교 신자였다면 미국 미디어가 이토록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우가 신앙 때문에 죽게 만든 종류의 극단주의에 대한 논의가 전국적으로 이렇게 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서구 문명 대부분에서 기독교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종교로 간주된다. 그래서 일부 미디어는 차우를 피해자로 그리는 동시에 그의 신학과 죽음을 불러온 문화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죽음을 비통해 하는 동시에 젊은 선교사 차우의 행동이 서구 사상의 한계와 이를 만들고 유지하며 또한 널리 알리는 문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그의 의도가 아니다. 사려 깊고 친절하며, 배려심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다.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가는 수십만 명의 미국인들은 사실 사랑의 이름으로 문화를 뒤엎으려 하는 셈이다. ‘No 데이팅’의 저자 조슈아 해리스는 순결 문화를 지지하며 연애에 수치를 주고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이런 내러티브는 원래 있던 것이다.

고결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여겨지는 명분을 내세우는 행동을 한다면 결코 그릇된 일을 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게 진짜 문제다. 이러한 무죄 상정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세계화가 유익하다고 믿는 서구 중심적 사고다.

역사적으로 크리스천들은 식민 행위, 순결 문화, 만연한 여성혐오로 상대의 동의를 크게 침해해 왔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체계에 대한 어떠한 저항이나 의견 차이도 굳건히 맞서 싸워야 하는 영적인 전쟁으로 보곤 한다. 이러한 상정은 위험하다. 선교사가 강력한 사명감을 느끼면 “불가능을 가능케 해야 하는 신성한 의무”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신이 자신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느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파해도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차우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소명’, ‘목적’, ‘예언’, 자기가 느끼는 ‘임무’가 신앙이나 선교사의 존재와 관여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누르게 된다.

차우는 자신의 성경에 창이 꽂힌 것을 거절의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극복해야 할 시련으로 보았다. 차우는(그의 일기 이외에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북센티넬섬 주민들의 ‘영생’을 위해 이들을 기독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영원한 책임이라고 생각해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원과 도덕적 책임이 합쳐지면 동의는 작은 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예수를 따랐던 최초의 교단은 여러 지역사회에서 저항과 적대를 자주 접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권력의 중심에서 오는 체계적 억압을 접할 때와는 달리)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려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예수 역시 제자들에게 이 왕국에 치유를 주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이 거부하면 발의 먼지를 털고 너희들을 받아주는 곳으로 가라고 말했다.

대부분이 백인인 서구 복음주의 사회의 크리스천들은 현대적 개념의 지옥을 너무나 두려워해, 예수보다도 급하게 행동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 같다. 차우는 백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선교에 대한 백인 복음주의적 접근을 취했다.

예수가 준 사명은 세계를 기독교화시키고 사람들의 주체성을 훼손하라는 게 아니었다. 타인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랑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사랑을 받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차우는 북센티넬섬 주민들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그는 침범했다.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냥 놔둬달라는 그들의 바람을 존중했어야 했다. 자기가 느끼는 사명감의 강렬함이 아닌, 예전에 북센티널섬에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했어야 했다.

차우의 의도는 선했겠지만, 타인의 의지를 침해하는 것이 선교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기독교적 하위 문화 속에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말하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사상과 믿음이 남들이 지닌 것에 비해 더 우월하고 고결하다고 믿어버리며, 부당하거나 애정이 없는 방식으로 강요하곤 한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세상을 구하고 싶다고 해서, 득보다는 실을 더 많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스타그램 선교사와 모험 투어리즘이 있는 이 세상에서, 교회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선교사 개인이 느끼는 사명감이 타인들의 삶의 주체성을 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젊은 선교사가 ‘구원’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못할 경우, 교회는 오만하게 신의 임무가 전능하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허프포스트US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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