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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투'라는 신조어의 무례함에 대하여

비슷해 보이는가?

ⓒhuffpost

내겐 오랜 습관이 있다. 한국 언론이 볼썽사나운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한겨레> 누리집으로 달려가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는 습관이다. 혹시 <한겨레>도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한겨레>의 오랜 필자이자 독자임을 자랑하고 다니는 내 입장은 대체 뭐가 되는지 하는 노파심 탓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한국의 유수 언론들은 최근 래퍼 마이크로닷 부모 사기 혐의로 시작해 래퍼 도끼, 가수 비, 배우 차예련과 가수 휘인, 배우 마동석 등으로 번져 나간 연예인 가족 채무 불이행 연쇄 폭로 현상을 가리켜 ‘빚투’라고 명명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여성들의 투쟁 언어였던 ‘미투 운동’에 ‘빚’을 덧붙여 만든 조악한 조어는 올해 언론을 통해 만나본 신조어 중 가장 사악한 신조어였다.

 

피해 생존자의 힘겨운 싸움을 방해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기사에 사용하는 언론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가 기간 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부터 <동아일보> <중앙일보> <와이티엔>(YTN) 등의 메이저 언론, <세계일보> <스포츠경향> <스포츠동아> <헤럴드> <한국경제> <머니투데이> 같은 유수의 전국지, <부산일보> <국제신문> <경기일보> 등의 유력 지방지…. 아마 해당 언론사들의 제호만 쭉 적어도 이 지면을 능히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나 할 이야기가 남았으므로 이 정도로 줄이자. 나는 노파심에 <한겨레> 누리집으로 달려가 해당 단어를 검색해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난감하다고 해야 할까. <한겨레>에서 그 무례한 단어를 언급하는 건 내가 처음인 것 같다. 부디 내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BigNazik via Getty Images

 

아마 이 조어법이 왜 무례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유명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을 향해 그간 제기된 적 없던 의혹이 제기됐다는 점, 같은 유형의 범죄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다는 점, 한번 터지기 시작하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피해 호소가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 피해자들이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살아왔다는 점들을 따져보면 채무 불이행 연쇄 폭로 현상이 미투 운동과 닮은 점이 많지 않으냐고 말이다. 더 나아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고통만 고통이고, 거액의 돈을 떼인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온갖 심적, 경제적 고통은 고통이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난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가를 놓고 저울질을 하거나 경쟁을 부추길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다소간의 유사함과 별개로 이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채무 불이행 연쇄 폭로 현상과 달리, ‘미투 운동’은 그간 피해 생존자들에게 가해진 묵시적 압박이 존재한다. 피해 사실은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세상에 알려서는 안 될 일이라는 식의 사회적 편견,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피해자가 무언가 빌미를 주었거나 평소 행실이 적절치 못했으니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냐는 식의 피해자 때리기, 금전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식의 ‘꽃뱀’ 낙인찍기 등 미투 운동에는 피해 생존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겹겹의 압박이 존재했다. 미투 운동은 그처럼 강요된 침묵을 깨며 피해 생존자가 다른 피해 생존자들을 향해 “당신만 성폭력을 당한 것이 아니라 나도 당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단순히 개별 폭로의 연쇄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고백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드는 연대의 고리가 바로 미투 운동의 본질인 것이다.

근본적인 차이점 외에도 이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다. 사회적 약자의 투쟁 방식을 전유해 그 의미를 흐리는 것만큼 해당 투쟁의 의미를 희석하는 일이 또 없기 때문이다. 걸 수 있는 게 목숨밖에 없는 이들이 최후의 투쟁 수단으로 사용하곤 하던 단식 투쟁은,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이 국회 의원회관 등을 무대로 단식 쇼를 벌이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꼭 이처럼 악의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성소수자들이 주변인들과 가족들에게 제 성 정체성을 밝히는 행위를 지칭하는 ‘커밍아웃’은 강요된 침묵을 뚫고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서겠다는 성소수자들의 결의를 담은 단어였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과 린치, 심하게는 죽음까지 당하곤 하는 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은 마냥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 앞에 당당하게 나서겠다는 의미를 차용해 수많은 사람들이 커밍아웃이란 단어를 차용해 오며, 점점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성소수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뇌와 위험의 무게는 휘발되기 시작했다.

제 정체를 밝힌다는 의미를 따온 ‘덕밍아웃’(무언가의 열광적인 팬을 뜻하는 신조어 ‘덕후’와 커밍아웃의 합성어. 자신이 덕후임을 밝힌다는 뜻)까지만 해도 큰 악의 없는 단어였지만, 그와 같은 조어법이 지닌 유희적인 성격이 강조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다. 커밍아웃이란 단어는 ‘털밍아웃’(털이 많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의미), ‘갤밍아웃’(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유저임을 밝힌다는 의미) 따위의 단어에 동원당하다가, 급기야 ‘일밍아웃’(극우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 이용자임을 밝힌다는 신조어)에까지 동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적 약자의 단어를 빼앗는 일은 이처럼 반드시 사회적 약자의 투쟁을 방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몇 가지 유사점에만 집중해 미투 운동이라는 단어를 전유해오는 행위는, 아직 현재 진행형인 미투 운동을 향한 조롱의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피해자 고통이 조악한 조어로 축약되면

단순한 용어 선택 실수에 왜 이렇게 열을 내느냐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이 모든 움직임이 미투 운동을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강한 심증이 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미투 운동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서지현 검사의 고발이 지난 1월의 일이었는데, 미투 운동 때문에 피로감이 쌓였다는 기사가 나온 게 5월(‘“아님 말고”…가짜 미투 주의보에다 무고죄 논란’, <뉴스핌> 5월29일)이었다. 이윤택과 오태석을 필두로 한 연극계 성폭력 고발이 터져나온 게 2월이었는데, 미투 운동이 연극배우와 관계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는 않을까 우려된다는 기사가 나온 게 3월이었다.(‘‘미투 한달’ 직격탄 맞은 대학로…“파산 위기죠”’, <더팩트> 3월6일) 영화를 촬영하며 상대 배우를 연기 중 성추행한 혐의로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까지 받은 조덕제가 유튜브 등의 채널을 통해 무죄를 주장하면, 언론사들은 신나게 그 소식을 퍼다 나른다. 한국 언론 중 상당수는 미투 운동을 향해 시종일관 무례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례한 제목으로 미투 운동을 공격한다.(‘‘경기만평’ 미투 가고…빚투’, <경기일보> 11월28일) 미투 운동이 ‘갔다’는 표현은 얼마나 그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지.

나는 강요된 침묵을 깨고 나와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대 중인 피해 생존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언론이 선택한 저 무례한 조어 앞에서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를 염려한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나는 한 푼 두 푼 모아온 돈을 하루아침에 사기당하고 천문학적인 빚더미에 깔려 신음했을 사기 피해자들을 생각한다. 자신들이 감내해야 했을 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고통들이, 미투 운동을 조롱하는 투의 조악한 조어로 축약되는 걸 보며 그들이 한번 더 참담함을 겪고 있지는 않을지 염려한다. 그리고 나는 연예계 가십을 다루며 인터넷 신조어들을 무분별하게 기사에 사용하고 헤드라인에 올리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을 생각한다. 언론은 한 사회의 공적 논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런 언론이 지금, 한국 사회가 사용하는 언어와 논의를 천박하게 만드는 데 가장 앞장서고 있다. 언론이라니, 가해자인 줄 알았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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