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당선되면 여러분들은 공장을 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로 공장들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시 일자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공장을 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약속드립니다. 약속드립니다.”
2016년 미국 대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0월, 미시간주의 소도시 워런(Warren)에서 열린 유세에서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오하이오 분들과 이 지역에 제가 말씀드립니다. 집 팔지 마세요. 집 팔지 마세요. 그거 팔지 마세요. 우리가 그것들의 가치를 끌어올릴 겁니다. 우리가 그 일자리들을 돌아오게 만들 겁니다. 그 (비어있는) 공장들을 채우거나 그것들을 허문 다음에 완전히 새로 지을 겁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2017년 7월, 오하이오주 북동쪽 작은 공업도시 영스타운(Youngstown)에서 한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말도 했다.
그 모든 약속에도 불구하고 두 지역은 최근 제너럴모터스(GM)가 발표한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됐다. 워런에 위치한 GM 변속기 공장과 영스타운 인근 로즈타운에 있는 GM 공장의 가동 중단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GM 노동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탓하지 않는다. 누가 당선됐더라도 일자리는 계속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어떤 정책을 동원하더라도 GM의 구조조정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시장의 법칙
29일 워싱턴포스트(WP)는 GM의 이번 구조조정으로 타격을 입을 지역사회와 노동자들의 말을 차분히 정리한 르포 기사를 냈다. 여기에는 ”또다시 다른 GM 공장으로 전환배치되기를 희망”한다는 타라 그레스(37)의 사연이 등장한다.
십대 자녀 둘을 둔 엄마인 그는 2000년에 오하이오주 서부에 있던 GM 공장에 취직했다. 모레인(Moraine) 공장으로 추정되는 이 공장이 문을 닫자, 그레스는 인디애나주의 다른 GM 공장으로 옮겼다.
약 5년 전에 다시 오하이오주 로즈타운 GM 공장으로 옮겼다는 그는 이번 구조조정 소식에 크게 놀라지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크게 실망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무엇을 할 건지, 어떤 제품 (생산공장)이 어디로 갈 건지 몇 년 전에 미리 다 알고 있다. 누구도 그걸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 큰 회사이지 않나. 그들은 신경 안 쓴다. 이건 비즈니스다. 우리는 숫자들이고. (누가 어떻게 하든) 상관 없다.”
WP는 ”이곳의 보편적인 정서는 기업들의 힘이 너무 강해져버려서 정부마저도 그들을 저지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일부 주민들은 (공화당, 민주당) 어느 당이든 정치인들이 손익 계산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업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 매체가 로즈타운 GM 공장 인근의 한 자동차 부품가게에서 만난 주민들도 트럼프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이들은 더이상 소형차와 세단을 구입하지 않는 미국인들에 대해, 또 정부나 정치인들이 기업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에 대해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이건 기업이다. 왜 미국 대통령이 기업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가?” 공장 노동자 출신인 이 가게 배송기사 마이클 헤이다(64세)가 말했다. 그는 민주당원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2016년에 트럼프를 찍었다.
그의 동료 직원이자 트럼프를 찍은 또다른 민주당원인 빌 맥클빈도 이에 동의하며 트럼프가 취임하기 훨씬 이전부터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수십년 동안 해고 통지서를 받아왔다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탄핵되기를 바라는 한 손님조차도 (GM 구조조정에 대해) 전적으로 대통령을 탓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따르는 단 하나의 법이 있는데, 그건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다.” 나무 팔레트를 수리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폴 니에미(68세)가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11월29일)
유력 우파 경제지이자 발행부수 기준 미국 최대 신문사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이 냉정한 ‘법칙’을 새삼스레 상기시켰다.
WSJ은 ”적절한 관세 조합과 세심히 관리되는 무역을 통해 (옛날처럼) 철강과 자동차를 미국 경제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이는 트럼프와 민주당”을 향해 ”경제는 노스탤지어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꾸짖듯 적었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 생산라인을 멕시코로 옮긴 포드를 맹비난했고, 그러다가는 이 업체가 링컨 MKC 생산라인을 켄터키주 루이빌에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하자 이를 자신의 공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 결정들은 모두 시장 변화에 따른 것이었고, GM도 마찬가지다.
GM은 쉐보레 크루즈, 임팔라, 볼트 하이브리드 같은 세단을 만드는 공장 생산을 중단한다. 낮은 유가와 연비 효율성 향상에 따라 미국인들은 트럭과 SUV를 더 많이 구입하고 있다. 2012년 절반에 달했던 미국 내 소형차 판매 비중은 3분의 1을 차지한다. 지난해 GM이 판매한 차량의 75%는 트럭과 크로스오버였다. 2012년의 60%에서 늘어난 것이다. 일본차 및 한국차와의 경쟁 속에 GM의 소형차 시장 점유율도 10년 간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략)
트럼프는 자신의 무역 술책이 시장의 현실들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버락 오바마가 기후와 규제에 관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틀렸다. 그가 모든 자동차 업체에 대한 보조금들을 끊기를 원하는 건 괜찮다. 그러나 그가 개입해 GM을 덜 경쟁력있게 만든다면, 트럼프는 더 많은 노동자들을 해치게 될 뿐이다. (월스트리트저널 사설 11월27일)
미국 제조업의 죽음과 삶
GM 로즈타운 공장은 1966년에 문을 열었다. 1980년대 ‘전성기’ 때는 1만5000명을 고용했을 만큼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다. 자동차 애호가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폰티악 파이어버드, 쉐보레 밴, 뷰익 스카이호크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풍요로운 시절을 상징하듯 웅장하고 화려했던 미국 자동차의 전성기가 곧 허무하게 막을 내렸던 것처럼, 이 공장의 활기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2006년 생산규모 축소에 따른 희망퇴직이 이뤄졌고, 몇 년뒤에 터진 금융위기로 GM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어떤 면에서 지난 수십년 간 로즈타운의 역사는 미국 공업의 역사와 매우 유사하게 들린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짚었다. 해외 업체들과의 경쟁, 자동화 등으로 인해 미국 제조업이 힘을 잃어왔던 과정과 로즈타운의 흥망성쇠가 자연스레 겹쳐진다는 뜻이다.
NYT는 그럼에도 GM 공장 덕분에 그동안 이 지역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지역의 다른 산업들이 쪼그라들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큰 도시로 떠나는 상황에서도 GM 공장 노동자들이 낸 소득세 덕분에 지역 정부는 인프라를 짓고 재정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
자동차 산업은 그 특성상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지역 정부 관계자들은 GM 공장 일자리 하나당 이 지역 일자리 7개가 달려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GM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와 관련 산업의 일자리들도 구조조정의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잠시 좋았던 시절이 돌아오는 듯했다. 2010년 쉐보레 크루즈가 이곳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자 공장은 다시 바쁘게 돌아갔다. 한국GM이 개발을 주도했던 중소형 세단 크루즈는 당시 고유가 시대를 맞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다.
20년 넘에 로즈타운 공장에서 일했다는 마리솔 곤잘레스-바우어스는 NYT에 ”세상에, 우리는 엄청 신났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3교대로 돌아갔고, 공장은 거의 100% 가동률을 보였다. 원한다면 (하루에) 12시간까지도 일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때만 해도 잔업을 하면 1년에 7만5000달러(약 8400만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벌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호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 다음날, GM은 3교대로 돌아가던 이 공장의 근무 시프트 하나를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1200여명의 노동자들이 영향을 받았다.
크루즈의 판매가 눈에 띄게 저조해지면서 지난 6월 로즈타운 공장은 2교대로 축소됐고, 1500명이 정리해고 됐다. 이번에 발표된 가동중단 계획으로 이제 남아있던 3500여명의 노동자들마저 일터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
인구 3000여명인 로즈타운의 지방정부를 이끌고 있는 아르노 힐은 GM 공장이 이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대들보”라고 WP에 말했다. 그는 GM 구조조정에 대해 특별히 트럼프 대통령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많은 대통령들’을 언급했다.
″그들이 ‘우리는 손을 뗀다’고 말했을 때 나는 놀라기는 했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던 보수성향인 힐이 말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대통령의 정책과 행동들이 그의 마을과 제조업계에 긍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빌 클린턴을 비롯해 많은 대통령들이 이 지역 유권자들에게 했던 약속을 깼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은 이 지역에 국방부 급여 처리 센터를 만들어 7000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힐은 ”그들은 선거 유세에서 많은 얘기들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것 좀 봐, 트럼프는 거짓말쟁이야’라고 한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이(정치인)들도 거짓말쟁이다.” (워싱턴포스트 11월29일)
10년 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008년 2월, NYT는 이 지역 유권자들을 향한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의 ‘장밋빛 약속’과 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응을 소개했다.
당시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러스트 벨트(Rust Belt)’라고 부를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 저는 젊은이들이 좋은 직업을 찾을 수 있고, 그 누구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 할 필요가 없는 커뮤니티들을 봅니다.”
오바마는 이렇게 연설했다. ”제가 가는 모든 곳, 영스타운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0년 동안 공장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가면서 주주들을 위한 수익을 창출해낸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갑자기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일자리가 해외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건강보험이 없습니다. 그들은 연금도 없습니다. 그들은 시간당 7달러를 주는 지역 패스트푸드 가게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십대 청년들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두 민주당 후보의 약속에 작은 희망을 품은 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많은 주민들은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빌 클린턴이 마을에 나타나 국방부 급여처리 센터를 지어 일자리 7000개(이 일자리들은 다른 곳으로 갔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날을 기억한다. 2004년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가 거리 반대편에 새로 지은 주정부 청사 단지가 있는데도 굳이 판자로 가려진 (버려진) 건물들 앞에 연단을 마련해 카메라가 영스타운의 추한 모습을 잡도록 했던 것도 기억한다.
28세인 필 키드는 ”우리는 영스타운과 공장들에 대한 (정치인들의) 공허한 약속과 똑같은 이야기들에 진절머리가 났다”고 말했다. 블로거이자 지역 활동가인 그는 ‘영스타운을 지키자’는 문구와 함께 철강 노동자가 망치를 들고 있는 이미지가 박힌 티셔츠 1000장을 팔았다. ”문제는 이곳이 민주당 텃밭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 표가 거의 따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걸 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저 누가 이기더라도 이번에는 우리를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뉴욕타임스 2008년 2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