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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9일 16시 01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1월 29일 16시 08분 KST

근대국가 일본을 만든 사람들

이태형
구한말(舊韓末) 인천은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기점으로 일본에 의한 조선침략의 교두보가 되었다. 월미도 인천 앞바다에서 2018년 8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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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 근현대사 읽기는 ‘어떻게 근대국가 일본은 만들어 졌나’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은 내 단순한 물음에 대한 조금은 긴 답이 되겠다. 처음에는 19세기 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시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 일본에 대한 글을 기획했으나 범위를 확장하여 ‘현대국가’까지 총 4부작이 되었다. 일본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시대의 변화와 인물들의 활동에 대해 담았다.

순서는 일본 근대화의 일대 전환점을 만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기를 다룬 ‘①근대국가 일본을 만든 사람들’ 편과 동북아를 전쟁으로 몰아간 군국주의 일본의 역사를 다룬 ‘②근대국가 일본을 무너뜨린 사람들’ 편, 그리고 1945년 패전 이후 세계 경제대국으로 일본이 재도약한 역사를 돌아보는 ‘③현대국가 일본을 재건한 사람들’ 편, 마지막으로 2018년 현재 시기 일본의 현황을 다루는 ‘④지금 일본을 이끄는 사람들’편 순이다.

*이 글에서 명칭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해 몇몇 단어는 한자를 병기했으며, 일왕의 명칭은 일본식 발음인 ‘덴노(天皇)’로 통일했음을 밝혀 둔다.

들어가며

일본(日本), 나는 이 두 글자 앞에 서면 기분이 묘하다. 내가 기억하는 일본의 인상은 크게 두 가지로, 말 그대로 명과 암이다. 하나는 우리의 역사적인 숙적 일본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들을 호명했던 단어, 왜구(倭寇). 왜의 해적 즉 일본의 해적이다. 우리 조상들에게 일본은 바다 건너에 살며 수도 없이 우리의 땅을 범하였던 두려움의 대상이자 야만과 폭력의 대상 이었다. 그리고 1910년에 이르러서는 대한제국을 무너뜨리고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을 체결해 우리의 국권을 피탈한 원수가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선진화된 강국 일본이다.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연상할 때 지금의 선진화된 동양의 모습은 일본에서 비롯되었다. 동양 최초로 근대국가 건설에 성공했던 저력, 비록 군국주의로 패망의 길에 들어섰지만 전후 다시 세계경제와 문화를 주도하는 국가로 거듭나기까지 서구인들의 눈에 일본의 역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일본도 인상적이었다. 전공 관련 분야로 얕고 넓게 본 일본의 행정 시스템과 복지제도는 유럽 선진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선진적이었다. 그리고 몇 차례 방문해 직접 본 일본의 모습은 왜 세계가 이들을 선진국이라 일컫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에게 일본에 관한 이 두 가지 인식은 별개의 것도 동등한 것도 아니었다. 역사 속 앙금이 풀리지 않은 일본의 모습과 내가 경험한 강국 일본의 모습을 교차시키며 일본을 인식하는 나의 무게중심은 전자에 실렸고 현실의 일본을 인식하고도 그 존재에 대해 깊이 알려 하지도, 인정 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랜 기간 일본을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남겨두었다. 내 안에 있던 지적 편협함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다시 일본을 맞닥뜨린 곳은 우리의 역사 속이었다. 내게 우리 역사 속 ‘만약’이 허용되었으면 하는 순간을 꼽아 보라면 단연코 19세기 조선의 선택일 것이다. 그때 조선이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면밀하게 읽고, 그에 대처하는 정책을 펼쳤더라면 지금의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정세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자연스레 다음의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 격동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 조선은 왜 변화의 물결에서 도태되었는가?

이태형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로 일본은 본격적인 근대화 시기를 맞이한다. 근대화의 상징인 신문의 시대도 이와 함께 도래한다. 같은 시기 조선은 개화의 흐름을 읽기보다 세도정치라는 어둠을 거두어 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메이지유신 이후로 개척이 시작된 북해도(훗카이도) 개척촌에서 2018년 7월 촬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러 책과 강연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때 읽었던 인상 깊었던 구절이 하나 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19세기 말 조선을 두고 “조선은 열등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산업혁명과 근대 정치체제를 동시에 성공시킨 나라는 서유럽과 미국 등 몇 개의 국가에 불과했으며 동방의 끝자락에 있는 일본이 ‘특이’했다고 첨언했다.

생각해보니 19세기에 서양세력에게 무기력했던 것은 비단 조선뿐이 아니었다. 세상의 중심을 외치며 적수가 없었을 것 같은 청나라마저 아편전쟁의 패배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할양하면서 서양세력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고 인도와 베트남, 필리핀 등 동양의 국가들은 서양세력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른바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 19세기였던 것이다.

그때, 불현듯 스쳐지나 간 질문은 단순명료했다.

“모두가 실패한 일을 어떻게 일본은 해냈는가?”

이 질문을 품게 된 뒤부터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답을 구하려 노력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에 관한 나의 편향된 인식을 내려놓고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일은 쉽지 않았다. 격동의 시기, 먼 미래를 내다보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공부하며 그들의 혜안과 진취성에 대해 탄복하면서도 그들이 정한론(征韓論) 즉 조선침략을 주창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온전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웠다. 나아가 2018년 지금 우리에게 그들의 역사가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묻다가도 매주 수요일 대사관 앞에서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성노예를 강요당했던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다. 무엇이 근대국가 일본을 있게 했는가, 그리고 누가 근대국가를 일본을 만들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가 『역사의 연구』에서 언급한 역사의 발전 과정인 ‘도전과 응전’의 흔적을 좇는 것과 유사했다. 19세기 말 혼란했던 시대, 일본에게 놓여 진 시대적 도전과 이에 대담하게 응전한 이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며 이전보다는 일본을 ‘있는 그대로’보게 된 것 같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일본을 존재하게 한 격동의 19세기, 일본으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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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캘브레이드 페리 제독( 1794~1858). 일본 앞바다에 등장한 흑선들 위의 페리 원정대를 본 일본인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 할 전환점을 마련했다.

1853년 7월의 일본이 직면한 위기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막부에게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에도(지금의 도쿄) 근처인 우라가(浦賀)에 서양 흑선(일본어로 구로후네)이 나타난 것이다. 수도 근처에 외국 전함이 출몰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 유명한 미국 페리 원정(Perry Expedition)이다. 우라가는 에도로 가는 에도만 입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우라가의 점령은 곧 수도인 에도가 봉쇄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막부는 다이묘의 반란을 원천차단하기 위하여 500석 이상을 쌀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의 제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리 제독에 맞서 싸울 해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은 내년에 답을 준다고 페리 제독을 돌려보냈지만, 선택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막부는 이듬해인 1854년 페리의 요구를 수용하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무력 앞에 굴복한 미국과의 국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1858년에는 미일통상조약까지 체결하며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일통상조약 자체가 치외법권, 협정관세 원칙 등 일본에 불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는 점에서 국내 정치세력들의 상당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이와 더불어 막부의 통상조약 체결을 고메이 덴노가 불허함으로써 절차적 정당성도 훼손되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전개

본격적으로 개항이 시작되던 1850년대 경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잠시 살펴보자. 당시 일본의 사상적 조류는 매우 다채로웠다. 크게 국학(國學), 주자학(朱子學), 난학(蘭學)이 주를 이루었다. 한 가지씩 학문적 조류를 살펴보면, 국학의 경우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집대성한 학문으로 ‘일본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사상적 기류와 함께 존왕양이 운동 즉 일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각 학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국학은 국수주의적인 학문으로 일본이 외세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는 순수한 민족이라는 사실과 100대 넘게 이어져오는 덴노가(家)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자학의 경우는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가 통치이념으로 강조한 학문이다. 주자학의 경우 신분제 질서 속에서 국가와 지배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막부의 주요 통치사상으로 자리매김 했다. 끝으로 난학은 쇄국정책을 펼치던 도쿠가와 막부에서 상업적 교류를 허락했던 네덜란드 교역지 나가사키의 데지마(외부세력과 교역을 위해 허용된 인공섬)를 통해 유입된 학문이다. 지칭하는 것은 네덜란드 학문이지만 서양학문 전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농업 생산성 증대 등의 실용적 목적으로 난학 연구를 장려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당시 서양의 발달된 의학, 군사학 등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은 서구의 기술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난학은 일본으로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창의 역할을 하고 일본의 시각으로 서양을 해석하는 틀을 제공했다.

정리하자면, 당시 일본에서는 국학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국수주의, 주자학의 발전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국가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난학의 발전으로 서양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과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한 막부에 대한 일본의 처사는 일본의 정체성에 심대한 훼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본격화 된 이유는 막부의 실정에 대한 불만을 존왕 즉 왕을 높이는 방법으로 권력을 다시 덴노에게 돌리는 운동을 펼침과 동시에 오랑캐인 서양세력을 몰아내자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여기에 개항 이후 금의 유출은 급격하게늘어나기 시작했고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해 새롭게 만든 화폐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에 서민들 또한 점차 막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개항을 체결한 막부 정권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또 엄격한 신분제 질서 속에 지배층에 불만이 쌓이던 하급 사무라이 무사들까지 동조하며 존왕양이 운동은 점차 막부타도 운동으로 확장 돼 갔다. 점차 260년에 걸친 도쿠가와 막부의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만든 사람들

일반적으로 일본의 근대화 기점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일본 근대화에 있어서 큰 변곡점이 되는 메이지 유신은 한 순간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화가 동양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일본에서 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변화하는 시대를 절박한 심정으로 읽고 온 몸으로 맞서려 노력했던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일본 근대화를 만든 세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 -사카모토 료마(1836-1867)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이 막부 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국가로 발돋움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료마는 1835년 도사번의 하급무사의 자제로 태어났다. 료마가 막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인 1850년대는 앞서 언급했듯이 페리 제독의 내항과 개국요구 등으로 일본의 앞날에 먹구름이 가득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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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는 홋카이도를 방문해 본 적도 없으나 홋카이도 사람들은 살아생전 홋카이도 개발을 강력하게 역설했던 개혁가 료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료마 기념관에서 2018년 7월 촬영.

뜨거운 가슴으로 조국을 구원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료마는 존왕양이론자들과 함께 도사근왕당에 들어가 막부 타도 운동을 단행했다. 특별한 허락이 없으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일본 무사의 삶이었지만 료마는 자신의 안정된 삶 보다는 당시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 마주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당시에 중죄로 다스려지는 탈번을 감행했다.

당시 료마의 목적은 일본 땅에서 서양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때 료마는 가쓰 가이슈(勝海舟)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료마의 삶을 송두리 째 바꾸어 버렸다. 가쓰 가이슈는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인물로 개화파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설에는 료마가 양이(攘夷) 즉 외세를 배격하는 운동과는 정반대로 적극적인 서양문물 수용을 외쳤던 가쓰 가이슈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의 사상에 탄복해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가쓰가 료마를 만날 당시 료마는 군함부교로 일하면서 일본 해군의 근대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가쓰 가이슈 문하에서 료마는 서양문물의 적극적인 수용만이 일본을 부강하게 해주고, 그 힘으로 오히려 서양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서양 문물의 수용이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료마의 구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구체제를 유지하려한 일본의 막부체제였다. 료마는 일본의 막부체제 종식을 위해 1866년 유명한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이끌어 냈다. 막부 말기 사쓰마와 조슈는 양대산맥을 이룰 만큼 힘이 있는 번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상이했는데 사쓰마는 친막부 온건파, 조슈는 반막부 급진개혁파였다. 토사번 출신의 료마는 이 둘의 힘의 결합만이 막부체제를 종식할 수 있다고 보고 필사적으로 이 둘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삿초동맹은 막부세력을 토벌하는 세력의 주축이 되었고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정권을 일왕에게 바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했다. 만약 이때 막부체제가 종식되지 않았더라면, 19세기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필두로 한 일본의 근대화의 전환기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부강한 근대 국가 일본을 설계한 자 –요시다 쇼인(1830-1859)

요시다 쇼인은 조슈번 출신으로 하급무사이다. 쇼인은 규슈 등을 여행하며 서구 문물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접한 바 있으며 사상적으로도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1853년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사령관 페리 제독이 우라가 항에 나타난 뒤로 쇼인은 일본이 살 길은 오로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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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은 19세기 변해가는 세계의 흐름속에서 약육강식의 원리에 입각해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청사진을 그렸다.

하지만 당시 막부정권과 민심은 서양세력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일본이 처한 위협에 대해 현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쇼인은 서구 문물을 직접적으로 배워보고자 몰래 미국 함선에 승선해 직접 미국 땅에 밞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해 감옥에 수감된다. 이때 저술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유수록(幽囚錄)이다. 이 책에는 막부체제의 타파와 에조치(훗가이도) 개간, 류큐의 병합, 조선과 만주의 정벌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이는 후에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쇼인의 주장한 당시에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이었으나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이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강대국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인은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고향집에 유폐되었으며 직접 정치 일선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신의 고향집에서 송하촌숙이라는 일종의 학교를 만들어 미래세대를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이었고 여기서 근대국가 일본의 청사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송하촌숙 출신의 인물들은 일본 정치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이곳 출신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총독이다.

현실의 역사 속에서 쇼인은 막부의 탄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의 문하생 중에서 일본메이지유신 시대를 이끌었던 세 명의 총리와 여섯 명의 장관이 탄생한 것을 보면 그가 열망했던 부강한 근대 국가 일본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의 손에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국가를 꿈꾼 자-후키자와 유키치(1835-1901)

후키자와 유키치는 규슈 나카쓰번에서 하급무사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난학을 공부하는데 흥미를 느꼈으며 후에 영어공부를 시작하며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860년, 유치키는 막부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서구문물에 크게 감화되었다. 이후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을 방문하며 『서양사정(西洋事情)』 등을 펴내며 일본에 서구의 사정을 알리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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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개화기의 계몽가, 교육가, 저술가이다. 그는 한 평생 개화와 더불어 일본인의 가치관이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에 입각해 변화돼야 함을 역설했다.

유키치는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에서 서구의 발전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의식의 측면에서 서구의 발전상을 바라보았다. 유키치는 개인의 합리성에 기반한 ‘독립정신’을 강조하였다. 1872년에 펴낸 『학문의 권유』에서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국민 계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가진 지식인 등을 양성하기 위해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창건했다. 그는 여기서 후학을 양성하며 서구열강에 힘으로 굴복하지 않는 길은 단순히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계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계몽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유키치의 주장에 많은 일본인들은 감화 되었으며 일본 메이지 유신시기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 받기에 이른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 유키치의 업적이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유키치는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적인 환경 속에서 당시 일본인들에게 사상적 방향성을 제시한 계몽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2편에서 계속

 * 이 글은 대구 사은재(師恩齋)에서 많은 날 새벽을 깨우며 큰 가르침을 주신 정석동 선생님, 조연희 사모님과의 대화 속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음을 밝혀 둔다. 항상 부족한 제자를 풍족한 사랑으로 채워 주시는 두 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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