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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곡의 귀환

  • 임범
  • 입력 2018.11.27 11:42
ⓒ보헤미안 랩소디
ⓒhuffpost

전에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소설이 나오고 영화화됐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영화에 빠져 청소년기를 보낸 ‘할리우드 키드’가 1940~1950년대 초반 태생 중에 많다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태어난 이들 중엔 영미 팝송에 미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더 많을 거라는. 그럼 이들을 뭐라고 부를까. 로큰롤 키드? 팝송 키드? 적당한 말을 못 찾았는데, 최근 대박을 터뜨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관람평들을 보며 영미 팝과 함께 성장한 이들이 정말 많음을 실감했다.

친구나 형을 통해 인생의 노래를 알게 되고, 발음대로 적은 한글로 가사를 외우고, 음량을 있는 대로 키워 듣다가 부모에게 욕먹고, 불법 복제한 레코드 앨범 ‘빽판’을 사고…. 40대 후반 이후 세대의 관람평들엔 이런 사연과 함께 당시엔 퀸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얘기도 꼭 들어가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하굣길에 광화문의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거기선 외국 가수의 새 앨범이 발매돼 미군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복제해 빽판으로 팔았고, 매주 빌보드 차트가 인쇄된 종이를 공짜로 줬다. 나름 얼리어답터랍시고 차트에 새로 진입한 곡 중 관심 가는 것에 줄 쳐 놓고 있다가 미군 방송 라디오의 ‘아메리칸 탑 포티’에서 그 곡이 나올 때 녹음해 듣고, 좋으면 빽판이 나오자마자 바로 사고…. 금지곡? ‘보헤미안 랩소디’를 포함해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곡의 태반이 금지곡이었다. 한국에선 금지해도 미군 방송에선 아랑곳없이 흘러나왔고, 빽판엔 금지곡이 다 담겨 있었다.

하지만 팝 가수나 그룹에 대해선 대충만 알 뿐 근황이나 앨범 제작 과정 같은 것은 알기 힘들었다. 정부는 금지곡뿐 아니라 팝문화 전반을 퇴폐시했고, 상당수 교사와 부모도 클래식은 고급 음악, 팝은 저질 음악이라는 논리 아래 학생들이 팝송 듣는 걸 꺼렸다. 팝송을 그렇게 들으면서도 팝 가수들을 예술가로서보다는 아이돌로 좋아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에 비틀스의 ‘골든 슬럼버스’ ‘캐리 댓 웨이트’의 가사를 접했을 때 하게 됐다.

이 곡들은 비틀스가 함께 녹음한 마지막 앨범 <애비 로드>에 실린 곡이다. 멤버들은 이 곡을 녹음할 때 해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십년 동안 함께 곡을 만들고 부르며, 비틀스다운 독창성을 만들고 지키느라 서로들 지지고 볶고 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합창한 그 노래의 가사다. ‘얘들아. 이제 네가 그 무게를 지고 가야 해. 오래도록.’ 뭉클했다. 창작엔 핑계가 없고, 오로지 자기 책임으로 가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때 비틀스 멤버들의 나이가 26~29살이었다.

퀸? 당연히 좋아했다. 세운상가에서 퀸의 스티커를 비싼 돈 주고 사서 볼펜, 공책에 붙였다. 멤버 중에 묵묵히 서서 기타를 연주하는, 키가 아주 큰 브라이언 메이를 좋아했다. 그래도 워낙 많이 들어서, 특히 ‘보헤미안 랩소디’는 라디오에서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러 갔을 때, 관객 가득 찬 극장에서 그 노래의 첫 소절이 피아노로 흘러나올 때 가슴이 왜 그렇게 뛰던지. 퀸도 비틀스와 같았다. 서로 싸우고 다투면서 창작의 무게를 짊어지고 갔다. 예술가에게 그 이상 뭐가 필요한가.

이 영화의 흥행을 두고 ‘50~60대 세대의 동질감 회복’ ‘신구 세대 간의 공감’ 등 훈훈하게 바라보는 보도들이 나온다. 하지만 한가지에만은 관대하지 않았으면 싶다. 창작물을 검열하고 금지했던 역사, 사람들, 그들의 생각에는.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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