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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지의 날

ⓒ뉴스1
ⓒhuffpost

원시로 회귀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멈췄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났더니 TV가 켜지질 않았다. 인터넷도 되질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와이파이를 잡으려 했는데 그것마저 되질 않았다. 다행히도 내 스마트폰은 SKT다. 사실 스마트폰도 KT로 바꿀 생각이었다. 묶음 할인 혜택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KT의 모든 것이 멈춘 그 날, 나는 묶음 할인을 원하지 않았던 것에 묘하게 안심했다.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SKT 스마트폰으로 LTE를 잡았다. 뉴스가 쏟아졌다. KT 아현빌딩 지하 통신구에서 화재가 났다고 했다. 집 바로 근처에 있는 기지국이다. 잠깐 바깥으로 나갔다. 소방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화재는 아직 잡히지 않은 모양으로, 연기는 계속해서 기지국 위로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원시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의 주말은 언제나 TV 시청으로 시작해 TV 시청으로 끝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TV는 재미있는 박스라기보다는 화이트 노이즈 박스다. 외롭지 않기 위해 부러 TV를 틀어놓는다. TV는 물론 넷플릭스도 당연히 나오질 않았다. 스마트폰을 테더링해서 인터넷을 켰다. 스마트폰은 끊임없이 ‘남은 데이터는 얼마입니다’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집은 고요했다. 적막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뒤집어졌다. 마포, 서대문구, 은평구, 용산구 등에서는 휴대전화가 먹통이 됐다. 가게들은 카드 결제가 불가능해졌다. 인터넷은 당연히 되지 않았다. 페이스북도 잠시 멈췄다. 테더링 등 임시방편으로 휴대전화에 접속한 친구들의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난 줄 알았어” “은평구는 안된다 마포구는?” “여기도 안됩니다. 아무 것도 안됩니다.” 일요일이 되어도 인터넷은 복구되지 않았다. 마포구는 전화선도 복구되지 않았다.

KT는 응급 복구를 위해 이동기지국을 급파했다. 서서히 몇몇 구에서 먼저 전화가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건의 개요도 밝혀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지하 1층 통신구 전체의 절반이 넘는 79m 가량이 화재로 소실됐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그 중요한 장소가 소방시설 의무 설치 구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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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요일 오후,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읽지 않고 쌓아둔 신간들을 하나하나 읽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KT 사태가 나에게 준 단 한 가지 미덕은 디지털이 모든 것을 연결하고 모든 관계를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잠시 과거로 회귀해 독서의 즐거움을 되돌려줬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나치게 넉넉하고 널널한 해석이다. 이번 사태는 그저 이틀 정도 사람들을 귀찮게 만든 재난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한 70대 노인이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119에 빨리 전화를 하지 못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포구에 거주하는 76세 노인은 갑자기 심장에 이상을 느끼고 고통을 호소했으나 남편의 휴대폰은 통신 장애로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다. 남편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휴대폰을 빌어서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구급대원들은 30분이 지나서 도착했다. 노인은 사망했다. 노인은 절규했다. “전화가 정상적으로 이뤄져 구급대원들이 5분만 일찍 왔더라도 아내는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노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잠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우리는 종종 디지털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여유로웠는지를 회고한다. 그러면서 디지털로부터 잠시 멀어지라는 충고를 서로에게 한다. 하지만 이미 디지털의 시대는 왔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 우리의 문명 자체가 지하에 갈린 케이블 위에 세워졌다. 그러니 케이블이 불타는 순간 문명은 허약하게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이번 재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묘한 증거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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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KT 화재 #디지털 #통신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