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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뒤에 숨은 기자단 투표가 위험한 이유

야구 기자단 투표의 맹점

ⓒ뉴스1
ⓒhuffpost

2001년 골든글러브 투표 때의 일이다. 당시 홍성흔(두산 베어스)은 박경완(현대 유니콘스)을 제치고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박경완의 성적은 타율 0.257, 24홈런 81타점 21도루였고, 홍성흔의 성적은 타율 0.267, 8홈런 48타점 9도루였다. 박경완은 포수 최초 ‘20(홈런)-20(도루)’ 클럽에도 가입했다. 한눈에 봐도 박경완의 성적이 나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프리미엄이 있던 홍성흔은 타율만 박경완에 1푼 정도 앞섰을 뿐이다.

투표 결과가 의아스러워서 ‘사수’였던 선배에게 “왜 홍성흔 찍으셨어요?”라고 여쭤봤다. 선배의 답은 “당연히 박경완이 될 줄 알고 홍성흔을 찍었지”였다. 이런 마음으로 투표한 이가 비단 선배만이 아니었을 터. 결국 ‘죽은 표’가 모여 ‘살아있는 표’가 됐고, 결과마저 바꿔버렸다. 홍성흔은 파이팅 넘치는 선수였고 ‘기자 프렌들리’ 선수이기도 했다. ‘객관성’을 바라지만 절대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이 야구 기자단 투표인 셈이다. 골든글러브나 최우수선수 투표 때 엉뚱한 선수에게 1~2표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85년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투표도 이런 주관성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물을 내놨다. 삼성은 전, 후기리그를 통합 우승하면서 김시진, 이만수, 장효조 등 특급 스타들을 배출했다. 김시진은 25승5패로 최다승과 최다 승률 1위, 평균자책 3위를 기록했다. 장효조는 타격 1위(0.373), 최다안타 2위(129), 타점 3위(75), 출루율 1위(0.467)의 성적을 올렸다. 이만수 또한 홈런 공동 1위(22), 타점 1위(87)를 비롯해 타율 5위 등의 성적을 남겼다. 팀 우승에 개인 성적까지 뛰어나 이들 중 정규리그 최우수선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최우수선수는 해태 김성한이 받았다. 수상자로 호명된 뒤 그 또한 당황할 정도로 예상외였다. 그의 성적은 홈런 공동 1위, 최다안타 1위(133), 타점 2위. <한국야구사>에 따르면 개표가 끝날 무렵 기자들 사이에서는 “뭔가 잘못됐다. 투표를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언론사 체육부에도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한국야구사>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삼성 선수단 표가 갈린 탓도 있고 “이상국 해태 홍보실장의 선거 운동을 통해 호남 선수에게 표를 던진 기자의 출신 성향이 작용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기자단 투표는 외국인 선수에게 유독 야박하기도 하다. 2012년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는 장원삼이었다. 당시 장원삼(삼성 라이온즈)은 다승 1위(17승)는 했지만 평균자책(3.55)이 높았고, 투구 이닝(157이닝)도 적었다. 한국시리즈 우승팀 에이스라는 강력한 ‘전리품’은 있었으나 객관적 지표에서 브랜든 나이트(넥센 히어로즈)에 밀렸다.

나이트는 당시 평균자책 1위(2.20), 다승 2위(16승)와 더불어 투수 최다인 208⅔이닝을 던졌다.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 이하 투구)도 30번 등판 중 27번이나 해냈다. 하지만 그는 기자단 투표에서 7표 차이로 밀렸다. ‘외국인 선수’ 배척 기조 때문이었다. 1998년 타이론 우즈(두산 ) 또한 이런 분위기 탓에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에 뽑히고도 정작 골든글러브는 이승엽(삼성)에게 내주는 촌극도 빚어졌다.

외국인 선수를 찍는 데 인색했던 한 기자는 말했다. 외국인 선수는 상을 받으러 한국에 오지도 않는데 왜 찍냐고. 또 다른 기자는 그랬다. 어차피 외국인 선수는 1년 계약으로 뛰는 ‘용병’ 일뿐인데 뽑을 이유가 있냐고. 외국인 선수는 ‘이방인’, ‘뜨내기’라는 인식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성적이 아주 특출하지 않은 한 국내 선수 편애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기자단 투표로 2018 KBO리그 최우수선수로 김재환(두산)이 선정된 뒤 일부 야구 관계자들은 말했다. “나라면 김재환 안 찍었어요.” 김재환의 과거 약물(스테로이드) 전력(2011년) 때문이었다. 몇몇 기자들은 시상식 이전에 SNS 등을 통해 김재환에게 표를 주지 않았음을 밝히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약물 전력이 있는 선수에게는 표를 잘 주지 않는 편이다. 성적보다는 페어 플레이, 공정성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성적지상주의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MVP라는 것은 성적과 함께 품위도 따라줘야하기 때문이다.

김재환의 MVP 수상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떠나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모든 투표에는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 투표의 결과는 기록으로, 야구 역사로 남기 때문에 투표의 주체자들은 응당 책임을 져야만 한다. 정보공개를 통해 투명 사회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담당 기자들이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이제 떳떳하게 공개해야 하지 않을까. 익명 투표의 맹점을 이용해 감정적으로, 주관적으로 투표하는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여러 사건사고에도 야구장을 찾아준 800만 관중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더 나아가 MVP, 골든글러브 투표 등은 현장 취재 경력 10년 차 이상에게만 부여하는 것도 고민해야 할 듯하다. 현재 시스템으로는 현장에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기자들도 투표권을 갖는다. 현장 전문가인 코칭스태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이때도 ‘투표 공개’는 필수적이 되어야 하고. 기자단 투표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는 ‘야알못 기자단 인기투표’라는 오명은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프로야구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비단 선수단만의 몫이 아니다. 가치에 가치를 더하는 것, 야구 역사를 켜켜이 쌓아가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투표 한 장에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민망하지 않도록.

*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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