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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법

ⓒhuffpost

동료들과 함께 화상 경험자들을 인터뷰해 책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를 냈다. 화재, 가스 폭발, 감전 등 심각한 화상 사고를 겪은 이들이 사고 당시의 기억, 치료 과정, 그 후의 일상, 그리고 고통이 되돌아보게 해준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망치로 팔을 내려치는 것 같은 아픔이 24시간 지속되는’ 신체적 통증과 ‘2년에 3억, 3년에 10억’이라는 천문학적 병원비와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하는 정신적 고통, 팔이 절단된 뒤 넘어진 아이를 더 이상 자신의 손으로 일으켜줄 수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의 내적 고통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냉대, 차별로 인한 사회적 고통 등이 담겨 있다.

화상 사고가 여타의 사고와 다른 점은 외모가 변한다는 것. 그리하여 화상 경험자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나를 나이게끔 하는가.’ 86퍼센트 전신 화상을 입은 정인숙씨는 1년이 넘도록 거울을 보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는 이제까지의 내가 아닌데도 나는 여전히 나일까? 전기기술자였던 송영훈씨는 감전 사고 후 왼팔을 절단했고 직업을 잃었다. 평생 단련해온 삶의 근육이 한순간 녹아버렸는데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 사회복지사였던 김은채씨는 사람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시선이 싫어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조차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나를 나이게 했던 모든 것들이 한없이 낯설고 두려워진 나는 대체 누구인가?

화상 경험자들은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몸이 견디기 힘들 만큼의 수술을 반복했고, 흉터를 감추기 위해 한여름에도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수년간 분투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흉터를 지우기 위해 애쓰다간 인생 전체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비로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하고 절망하던 이들은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과도한 희망도 과도한 절망도 허망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삶 역시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상처까지도 바라보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가며 천천히 관계를 복구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복원해 나간다. 그리고 그 힘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곁에 서고자 했다.

8년 전 어느 늦은 밤 송영훈씨는 병원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끔찍한 통증과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가 이 병실 저 병실 기웃거리며 애타게 찾았던 사람은 의사도 사회복지사도 심리상담사도 아니었다. 바로 자기 같은 사람이었다. 머리로 아는 것 말고 몸으로 앓아본 사람, 자기처럼 아파 보아서 이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사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이 통과해온 고통을 이야기하는 송영훈씨는 지난날의 자신이 가장 간절히 필요로 했던 존재가 되었다. 이야기가 된 고통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한다. 나는 이 위로와 연대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채 무대 위에 오른 화상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들어주면 좋겠다. 이들이 바라는 건 무지하고 무례한 시선에 의해 갇혀버린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 바뀌어야 할 것은 갇힌 자들이 아니라 가둔 자들이다. 화상 경험자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전해줄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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