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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야구, 행복한 2등도 있었다

ⓒhuffpost

2004년 한국시리즈 직전의 일이다. 정규리그 1위 현대 유니콘스는 삼성 라이온즈와 결전에 앞서 선수단을 모아놓고 출정식을 했다. 그날 밤, 기자들과 뒷풀이 자리에서 강명구 구단주 대행은 작심한 듯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 우승하면 꼭 지면 광고를 할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다. 보통 스포츠 구단이 우승을 하면 모그룹이 신문 지면 등에 우승 소감과 팬들에 대한 감사 광고를 낸다. 2018 한국시리즈에서 정규리그 14.5경기차의 승차를 뒤집고 두산을 꺾은 SK 와이번스도 14일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다. 하지만 2003년 현대는 모그룹 자금 사정 등의 이유로 한국시리즈에 우승을 하고도 광고를 싣지 못했다.

정작 감사 광고를 낸 구단은 따로 있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 접전 끝에 패한 SK 와이번스였다. 2000년 팀 창단 뒤 하위권에 전전하다가 처음 한국시리즈에 오른 SK는 ‘행복한 2등입니다’라는 문구로 신문 전면광고를 냈다.

한국시리즈 패배 팀이 신문 광고를 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초보 사령탑인 조범현 감독이 SK 선수들을 이끌고 보여준 가을의 패기는 박수 받기 충분했다. 당시 SK는 정규리그 4위로 포스트시즌에 올라 준플레이오프(삼성전 2승), 플레이오프(KIA전 3승)에서 단 1패도 없이 한국시리즈에 올라 정규리그 승차가 14경기였던 현대와 끝장 승부까지 가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아름다운 2등’이라는 칭찬이 아깝지 않은 행보였다.

2015년에도 한국시리즈 승자만큼 패자가 주목 받았다. 바로 삼성 라이온즈였다. 정규리그 1위 삼성은 한국시리즈 직전 터진 해외 불법 원정 도박 혐의로 마운드의 주축 3인방(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이 엔트리에서 제외되며 전력이 반쪽이 됐다. 그래도 1차전을 승리하며 내리 5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가 싶었지만 내리 4연패 하면서 우승 트로피를 두산 베어스에 내줬다.

류중일 당시 삼성 감독은 경기 직후 패장 인터뷰를 하면서 “프로는 1등이 돼야 한다. 2등 하니 이상하다. 4년간 우승했지만 올해 실패했다“고 패배를 받아들였다. 이후 “두산 우승 축하해주러 가봐야 한다”며 인터뷰실을 서둘러 떠났다.

구단 제공
구단 제공

류중일 감독이 향한 곳은 3루 더그아웃이었다. 류 감독은 한국시리즈 시상식이 열리자 3루 더그아웃 앞에 선수단과 함께 도열해 두산 선수들이 트로피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보통 한국시리즈에서 패한 팀들은 우승 팀이 그라운드에서 얼싸안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이 더그아웃을 빠져나가는데 삼성 선수단은 ‘패자의 품격’을 보여줬다.

류중일 감독은 이후 인터뷰에서 “두산이 우리보다 잘했기 때문에 패자로서 승자에게 보내는 축하의 의미였다”면서도 “우리 선수들이 두산 선수들에게 축하를 전하는 동시에 그들을 보면서 아쉬움, 그리고 ‘내년에는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랐다”고 했다. 프로 사령탑 데뷔 뒤 처음으로 정상 등극에 실패한 류 감독 또한 감독 데뷔 첫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군 김태형 두산 감독을 보면서 초심으로 돌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직후에도 ‘패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2017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7차전 접전 끝에 패한 LA 다저스가 휴스턴 지역 신문인 ‘휴스턴 크로니클’ 맨 뒷면에 전면광고를 실어 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축하했다.

7차전 직후 다저스 데이브 로버츠 감독과 휴스턴의 AJ 힌치 감독이 끌어 안는 사진에 ‘LA 다저스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017 월드시리즈 우승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휴스턴은 1962년 창단 뒤 55년 만에 처음 월드시리즈 패권을 차지한 터였다.

다저스는 2018 월드시리즈에서 패한 뒤에도 보스턴 레드삭스를 위해 보스턴 지역 신문인 ‘보스턴 글러브’에 축하 광고를 게재했다. 더불어 보스턴의 우승이 확정된 5차전 때 사용한 홈플레이트와 마운드의 투구판을 보스턴 구단으로 보내줬다. 패배의 품격 그 이상 아닌가.

덧붙이기. 2004년 우승을 한 현대 유니콘스는 구단주 대행의 사전 다짐처럼 한국시리즈 다음날 그토록 ‘한이 되었던’ 지면 광고를 냈다. 그것이 현대의 마지막 지면 광고였다. 현대는 여러 부침 끝에 2007년 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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