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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5일 16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1월 15일 16시 58분 KST

프랑스 르 퓌 길 800km 걷기 여행을 시작하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따뜻하겠지]

류승희
화산이 낳은 도시 르 퓌 앙 블레
huffpost

198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줄곧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류승희가 프랑스 르 퓌 길 도보 여행에 대한 에세이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따뜻하겠지’. 이 책의 일부가 매주 목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된다.

“당신의 꿈 가운데 가장 미친 꿈일지라도

달을 향해 조준하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실패한다 해도,

별들 가운데 떨어질 테니.”

 

나는 나와 여행을 떠났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무려 1600킬로미터를 걷는 여행이었다. 950년, 첫 순례자 고데스칼크가 걸었던 루트인데 프랑스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의 르 퓌 길(르 퓌 앙 블레–론세스바예스)과 카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és를 합한 길이다. 나는 일반적인 루트와는 반대로 카미노 프란세스를 먼저 걸은 뒤 르 퓌 길을 걸었다.

사실 800킬로미터나 걸은 후 르 퓌 길에 다시 오르게 된 이유는 카미노 프란세스에서 만난 발레리 때문이다. 그녀는 정열을 다해 유혹했고 말끝마다 르 퓌 길을 자랑하며 그리워했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그렇지?’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가라면 더욱 후회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에 치명적으로 흔들렸다. 사실 카미노를 처음 걷게 된 동기도 화가 반 에이크가 그 길을 걸었다는, 책에서 읽은 한 구절 때문이었다.

맙소사, 딱 한 구절에 내 인생을 걸다니!

출발 동기야 어찌 됐든 르 퓌 길은 초심부터가 달랐다. 카미노 프란세스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꽉 찬 나머지 터질 듯한 팝콘 같은 심정이었다면, 르 퓌 길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한 내면을 응시하며 뒤로 물러나 볼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애처롭게 핀 들꽃, 멀리서 달려오는 자동차 뒤로 흩날리는 흙먼지, 까닭 없는 슬픔, 유서 깊은 도시, 찬란한 중세 건축물, 섬세한 장인의 손길, 가슴이 뻥 뚫리는 광활한 대자연, 매혹적인 마을, 감춰진 문화와 예술, 프랑스 오감의 신비…… 끝도 없는 낱말들이 르 퓌 길 하면 떠오른다. 진정 르 퓌 길은 눈을 위한 파티이자 감동의 연속이었다. 발레리를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꼼지락

1998년, 프랑스 르 퓌 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또한 이 길 위에 놓인 도시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이 15개나 된다. 이 말은 르 퓌 길을 걸으면 적어도 이틀에 하루꼴로 깜짝 놀랄 만한 장소와 마주친다는 얘기다. 그렇다. 르 퓌 길은 자연을 중시한 길도 길이지만 매혹적인 문화의 흔적도 무한정 접하게 해준다. ‘예술의 나라’ 타이틀을 쥔 프랑스의 매력이 곳곳에 숨어 있다.

길은 계절에 따라 아주 다르다. 르 퓌 길을 여름에 걸었던 나는 작열하는 태양과 더불어 15개국이 넘는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들을 만났다. 매해 180개국의 순례자들이 그 길을 찾는다고 하니 어쩌면 별일도 아니다. 내가 만난 유럽인들은 3대 버킷 리스트로 산티아고 순례를 자주 꼽는다. 왜일까. 지구에는 수많은 도보 여행길이 있는데 말이다. 나는 트레킹 전문가가 아니므로 산티아고 길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 길을 걷고 난 뒤, 비로소 나 역시 자연스레 공감하
게 된 내용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길은 평범한 길과 달라. 마치 길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 길에는 시간을 초월한 어떤 높고 위대한 사랑의 큰 빛이 있어.”
“마르지 않는 무궁무진한 샘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길어 마시느냐는 순례자 각자의 몫이야.”

“다른 순례자들과의 만남으로 길의 특성이 만들어져. 그것이 곧 이 길의 아름다움이야.”

“길을 2주나 3주 걷다보면 태어나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몸이 두 발로 작동한다는 것을 다시 익히게 돼.”

“하루 12시간 동안 자연이 개최하는 위대한 공연을 매일 감상할 수 있어.”

“황홀한 자유를 맛보며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세상에 꽃이 피는 것 같은 단순한 진리를 다시 깨닫게 하는 길. 여기에 사람들과의 대화, 예배당에서 배우는 침묵까지…… 몸이 새롭게 좋아짐을 느끼게 될 거야.”

류승희
화산이 낳은 도시 르 퓌 앙 블레

그랬다. 길의 여정은 맑은 샘물 같아 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쳐졌고 종종 스스로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이 길은 그런 독특한 재주가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배낭을 풀고 싸면서 빈자의 편안함을 알게 되었고,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다는 점에서 삶은 경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기막힌 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가족 같은 초월적 사랑의 신비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봇물 터지듯 말하게 되거나 글을 쓰게 되는 현상 또한 이 길을 마친 순례자들의 특징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서적이 출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프랑스도 출판물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970년대에 붐이 일었다. 길의 역사를 파헤친 다큐멘터리 형식의 책이었다. 독일, 남미, 캐나다 등에도 책으로 알려졌고 우리나라 역시 매한가지 아닐까.

이 길을 걷고 난 뒤 작가의 꿈을 이뤘다는 파울로 코엘료, 그가 길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한 순례자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순례자들은 무엇을 찾아서 이 길로 오는 걸까?

침묵의 시간, 자신 또는 타인과의 대화, 국제적인 만남, 탈바꿈, 도전, 신비의 경험……?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덧붙여 이런 것들도 있다고 소개하고 싶다.

일상의 하찮은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겸허한 자세로 걸으며 마주치는 아름다운 풍경에 경탄하고,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태초의 풍요로움에 젖는 것. 동시에 순례자와 동반하는 야고보 성인의 정신을 느끼며, 우주의 지혜를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 땅을 울리며 걷는 순례자의 힘찬 발걸음 하나하나가 등대 되어 성찰의 항로 표지를 밝혀주는 것, 따라서 고독 속에서 순수한 순례자 자신만의 길을 창조해나가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프랑스 도보 여행 에세이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따뜻하겠지(꼼지락)’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