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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사실, 외면된 외침

  • 김성경
  • 입력 2018.11.15 11:57
  • 수정 2018.11.15 11:58
ⓒReuters
ⓒhuffpost

“그들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요?” “숨기고 있는 무기가 있다면요? 어쩌면 대량살상무기일지도 몰라요.” 한반도의 평화를 논의하기 위해 런던에서 만난 전직 영국 관료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향한 그들의 불신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공고했으며, 북한의 변화에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북한은 대화의 상대는커녕 여전히 제압되어야만 하는 ‘악의 축’에 불과한 듯했다.

그들의 언설에는 2003년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펼쳤던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때도 불량국가 이라크와의 협상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으며, ‘미친’ 사담 후세인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는 파괴력과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인류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했다. 몇 번의 테러를 경험한 후 영국 사회 속 증폭된 두려움이 전쟁 반대를 외치며 런던 거리를 메운 수백만 시민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상당수는 평화를 위해 전쟁이라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영국의 이라크 침공을 조사한 칠콧 보고서에서는 이라크에 있다던 대량살상무기는 결코 ‘임박한 위협’(imminent threat)이 아니었으며, 이라크 전쟁이 잘못된 정보와 부적절한 법적 근거에 기반을 둔다고 결론짓는다. 이 보고서는 영국 정부가 정보기관의 비밀정보를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재가공했으며 싱크탱크, 전문가 등과 공모하여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과장했다고 평가했다. 몇몇의 입김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문제가 보고서의 주요 논점이 되고, 불확실한 정보가 ‘사실’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이라크는 자신들의 결백을 여러 차례 국제사회에 호소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라크 정부는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1만2000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하기도 했으며, 사찰단에 미사일 기지와 의심 지역 등을 공개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한스 블릭스 유엔 이라크무기사찰단장은 유엔안보이사회에 참석하여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의 흔적이 없다고 직접 보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과 영국은 사찰단의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이라크가 제출한 보고서를 묵살한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것처럼 전쟁의 이유였던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권 개선을 외치던 미국과 영국은 무고한 시민 18만여명의 죽음에 직접적인 가해자가 되었다. 게다가 영국은 전쟁 이후 가중된 테러 위협과 불안정한 중동으로부터 밀려드는 난민 행렬로 더욱 위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영국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역사를 충분히 성찰하지 못한 듯했다. 그랬다면 북한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을 수는 없었으리라. 하긴 이런 태도가 굳이 영국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주춤하자 미국 일각에서는 싱크탱크와 전문가들의 권위에 기대 확인되지 않은 심증을 ‘사실’인 양 떠들어댄다. 이미 알려진 상황을 최근 북한의 이중적 움직임으로 둔갑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라는 명목 아래 역사적 대전환의 기회는 쉽사리 망각된다. 북한을 불신하는 세력은 공고하며, 북한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한반도 평화는 지금까지 세계를 호령했던 막강한 세력과 그들의 의식체계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쉽게 지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의 전쟁게임이지만 우리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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