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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3일 14시 17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1월 13일 14시 17분 KST

우리의 ‘준이 오빠’들

이우만
huffpost

30개월 지났지만 옹알이도 없었다. 발육이 늦는 줄만 알았다. 설마? 병원에선 발달장애라 했다. 일곱 살 지능으로 살아야 한단다. “우리 집안에 그런 사람 없는데.” “저희 조상 중에도 없는데.” 가계부터 떠올린다. 할머니는 100일 동안 새벽 3시 예불을 하고, 특수교육이 시작된다. 김금숙의 만화 <준이 오빠>(한겨레출판 펴냄)가 눈에 오래 고이게 했다.

판소리로 소통하는 발달장애 청년 최준의 삶과 가족의 고군분투 실제 이야기다. 눈물과 웃음이 범벅된, 말 못할 해프닝이 가득한 나날이 거친 듯 섬세한 작가의 붓으로 살아났다. 영상 이상의 리얼리티다. 담담하다. 그러니, 더 머물게 한다. 또한 묻는다. 이들은 당신들 가까이 있는 생이다. 혹여 편협된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가.

발달장애인의 실화 다룬 만화

학교에서도 힘드니 은근히 전학을 권하는 교장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은 엄마. 이뿐이랴, 만화의 여백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가족의 일이 당신의 삶처럼 공감하게 하지만 맑은 힘이 느껴진다. 행간의 언어에서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도 만난다.

다행히 준이 오빠는 판소리를 만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판소리 대회 최우수상까지 받은 소리꾼이지만 엄마나 오빠, 누이가 늘 따라다녀야 한다. 텅 빈 들판에 홀로 내려앉은 별처럼 발달장애 부모들은 평생을 건 손길을 멈추지 못한다. 그들의 삶은 아이의 삶과 함께 그냥 간다. 아이의 슬픔과 아이의 기쁨이 부모의 길이다.

이 장면에서 미어졌고, 함께 머물렀다. 누이에게 떡볶이를 사 가져온 준이 오빠에게서, 남편도 자기도 준이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기도 앞에서. 그 나머지는 화자인 여동생 자신이 보살피겠다는 독백 앞에서. 디테일한 시대 묘사와 함께 흘려보낼 수 없는 준이 오빠네는 우리 시대의 어떤 경우들과 같지 않을까.

얼마 전 엄마 넷과 차 한잔 나눌 자리에서였다. 한 젊은 엄마, 묻지 않았는데 자기는 발달장애아를 둔 엄마라고 했다. 명랑했으나 세상을 향해 할 말이 너무나 많아 보였다. 청와대 앞에서 발달장애인의 처우를 위해 오랜 기간 시위하기도 했다 한다.

“가장 시급한 거요? 평생교육이죠. 직업훈련 같은 교육과 직업이죠.” “단 얼마를 벌어도 내가 번 돈이라고 하며 쓸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젊어서 돌봄이 더 수월하나 어른이 될수록 부모도 늙잖아요.” 학교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보조교사를 두는 배려가 필요하다 했다.

그나마 학교가 안전장치로 돼 있는데, 어른이 되면 그마저의 혜택도 누릴 수 없는 현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발달장애인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다른 모든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데 공감했다. 참 공교롭게도, 다른 세 엄마도 속엣말을 꺼냈다. 조카가 장애라고. 아! 준이 오빠가 겹쳐왔다.

다만 말하고 싶지 않은, 말하지 않은 가족사일 뿐이다. 돌아보니, 우리 주변에 ‘준이 오빠’들이 얼마나 많은가. 30대 젊은 커플 가운데도 이런 고민을 가만히 말하는 이가 많다. 발달장애(지적, 자폐성) 22만6천 명 중 19살 넘는 성인 발달장애는 전국에 17만 명. 10명 가운데 8명꼴로 세상과 떨어져 산다 한다. 해마다 3.6%씩 늘고 있다. 최근 정부는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턱없이 못 미친다. 사회안전망 사각지대의 발달장애 부모들은 아이의 치료를 위해 사설 기관을 찾아다닌다. 돌봄 노동에 경제적 무게까지 덮친다. 발달장애도 치매처럼 국가 책임제를 할 때가 됐다.

34.4년 동안 날마다 9시간씩 돌봄 노동

더구나 발달장애는 아이의 생만큼 돌봄 부담이 크다. 2011년 서울시복지재단의 조사. 성인 발달장애인 돌봄 기간은 평균 34.4년. 47.7%가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돌본다. 부모는 아이의 자립이 꿈이다. 작은 소리라고 하는 것이 당사자에겐 천둥 소리로 들린다고 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저런 경우들, 어느 날의 교통사고처럼 온 일이라면, 혹시나 우리에겐 닥치지 않을 일이란 없다. 누구도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를 외면할 권리는 없다. 당신도, 나도 서로 다르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우리의 준이 오빠가 있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